문화재 역사 유적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27인의 용사들. 법흥결사대

心 鄕 2007. 7. 10. 19:51

향토사학자 한상웅씨가 자료조사하여 발표한 영월문화원 발행 1998년판 향토지 제 14집에 있는 내용입니다.
"법흥리 27인의 용사들"에서 지난 6.25 전쟁 중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진한 감동을 느꼈기에 여기 그 전체문장을 전하여 드리며, 본문이 발표된지도 이미 9년이나 지났지만 자료 책자를 찾아내어 보내주신 영월문화원에 감사드립니다.

 

영월문화원 발행 “내성의 맥 향토지 제 14집 p278~288”

 

법흥결사대
 - 6.25 당시 결사대 활약상 -

 

       향토자료 조사보고서
조사자 : 한상웅(향토사 연구위원)
조사일시 : 1998.1.10 ~ 1998.9.2
조사지역 :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1. 조사경위

 

1)목적
첩첩산중 오지산골 강원도 영월에는 신라 자장율사께서 창건한 5대 보궁 중 한 사찰인 법흥사가 있다.
차령산맥 원두에 선 사자산(1166m) 맥락 연화봉 하에 모셔진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친견하고자 오늘도 소원을 기원하는 신도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6.25의 총성이 멎은 지도 어언 50여년,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법흥사를 본거지로 인민군과 대치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고 산화한 미공개 전사가 발굴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법흥리는
후삼국 시대 양길의 부하 궁예(891년. 진성여왕 4년)가 평창 강릉 공격하기 위해 축성한 법흥산성과
임진왜란 때 고씨굴에서 항거하다 치악산에서 탈출하여 법흥 무릉치를 넘은 ‘고종원 의병’과
3.1운동 때 금마리 만세사건시 법흥골에 피신하였는가 하면,
한국동란 때 죽은 유골이 지금도 나와 그때의 처참했던 전투를 대변하고 있다.

 

2) 명칭 : 법흥결사대(27명)
소대장 : 송대성
분대장 : 이명준. 서석근
향도 : 박종수
연락병 : 송대희. 김기완
김장녹. 신순세. 신평수. 김세진. 이진석. 유천준
신재극. 이강진. 안기봉. 김경우. 김삼용
이흥수. 이운학. 신순봉. 김성원. 김성내. 유태산.
유기종. 김돌봉. 이상진. *유현(원)산.
*뒷편 총살당한 대원 16명 중 유원산 으로 표기된 분 같음

 

3)활동기간 1950.7.4 ~ 9.30

 

4)법흥리 지리적 여건
영월읍에서 서쪽으로 40여 km에 위치한 법흥리는 어쩌다 주천강을 갈라치면 열두나드리(개울을 열두 번 건너야 함)를 지나 하루 품을 내어 다녀와야 했고, 길목에 술집이 많아 주막에서 만난 이웃들은 막걸리 한잔으로 대화하고, 일제 강점 시는 수정 광과 금광 등이 있어 찾는 이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법흥리는 백덕산이나 안흥재를 넘어 평창과 안흥으로 직통하는 군사적 요충지라고 보겠다.

2. 활동내용
1950년 6월 25일 새벽, 일요일의 정적을 깨고 탱크로 무장한 괴뢰군은 물밀듯이 밀려와 이곳 오지산골인 법흥에도 총성이 울리며 흑백의 논리 속에 사상의 갈등을 겪을 때, 법흥사 노전에 숨어있던 ‘송대성‘이 ’김성내‘ 스님을 설득, 안흥골과 능지골에 은신해 있는 ’이명준‘외 24명을 규합 법흥결사대를 조직케 되었다.
이때 스님께서는 임진왜란 때 서산·사명대사께서 총칼을 대신하여 적장을 굴복시킨 일화를 소개하며 기꺼이 응하셨다.
8월 13일 경비대 출신인 송대성을 소대장으로 추대하고 전시 편재를 완료한 후, 간단한 훈련을 숙지시키던 중 2명의 수상한 사람을 생포해보니 인민군이었다.
이들 도한 이북정치가 싫어 원주 치악산에서 무기를 버리고 마을로 내려와 사정을 해 한복을 얻어 입고 여기까지 왔으니 목숨만이라도 살려달라며 애원하였다.
처형하자는 대원과 살려주자는 대원이 반반일 때 ‘주지 김준상 스님’께서 한번 기회를 주자는 설득이 있어 인민군 출신 ‘이상진’· ‘김성원’ 두 사람까지 합류하게 되었다.
8월 13일 인민군이 자주 나타나는 백덕산 당재로 가서 매복해 토벌하기로 하고, 이동 중 잠복해있던 ‘이명준‘ 대원의 비상 신호가 왔다. 긴장한 대원들은 총을 휴대한 인민군과 무장한 대적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소대장 송대성은 일제히 단도를 투척하고 실패하면 백병전도 각오하라 하였다.
척후병의 연락에 의하면 2명이 총을 휴대하고 나머지는 비무장이라 그들을 안심시켰다. 때를 같이하여 송대성 대장의 단도가 번개같이 날아가 목에 꽂힘과 동시에 쓰러졌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전원 체포하여 박덕술 골로 끌고 가 전원 타살하였다.
대원들은 다시 백년광산 사무실에 내려와 두 번째 작전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8월 18일 능지골에서 인민군 2명과 당원 4명이 옥수수 수확량 조사차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하였다가 인민군 1명만 생포하였다. 보복이 두려워 생포한 인민군은 즉석에서 처형하였다.
이상진 대원이 이곳에 있으면 위험하니 원주 치악산에 숨겨둔 총 2정을 가지러 가자고 했고
8월 20일 치악산에 도착하여 총 2정은 찾았으나 실탄은 없었다.
당재서 뺏은 총 2정과 도합 4정이 있으니 대원들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사기는 충전하였다.
다시 법흥사(노전)로 와서 김장록(녹) 모친이 날라다 주는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손들어“소리가 났다. 인민군 한명이 총부리를 겨누고 부엌으로 들어오는데 같이 왔던 부역자의 실수로 넘어졌다. 때를 같이하여 날쌔게 총을 뺏어 인민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니 총알이 없었다. 속았다 싶어 개머리판으로 때려누이고 도망치려는데 70~80명의 인민군이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중과부적이었으나 그냥 죽을 수는 없다 생각하고 죽기 아니면 살 기식으로 육탄공격을 하는데 엎치락뒤치락 하는 사이 소대장 송대성이 큰 돌에 머리를 맞고 유혈이 낭자하였다. 인민군들은 이명준. 김성원 대원을 도망 못 가게 쇠고랑을 채우고 마을의 광에 가둔 후 도망간 대원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
인민군은 ‘이런 악질분자는 영월 인민재판장에서 처형 한다‘며 수주 파출소로 이동 시켰다.
9월 7일 제발 나머지 대원이라도 무사하길 바랐는데 고함소리가 나 쳐다보니 박종수 대원 외 5명이 포승줄로 묶인 채 유치장으로 들어왔다. 소대장 송대성은 상처가 악화되어 신음소리로 아픔을 대신했다. 대원 한명씩 불러다 물고문과 고춧가루 고문이 이어지니 고통을 참지 못하여 죽이려거든 빨리 죽이라고 고함쳤다. 더 이상 체포를 단념한 인민군은 나머지 대원을 협박하여 자수를 권유 시켰다.
백년광산 사무실 마룻바닥에서 명단을 찾아내 더 버틸 수 없음을 감지한 대원은 자수하기에 이르렀고, 법흥사 격전장에서 도망친 5명을 제외한 22명이 포박되어 9월 24일 아침 트럭을 타고 마차를 거쳐 영월경찰서로 이동되었다.
소대장의 부상은 대원들의 사기를 저하시켰으며 선임분대장 이명준 또한 포박상태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
8월 23일부터는 대원 한사람씩 끌어다가 고문하여 주검이 되게 하였다. 운명의 날은 어김없이 밝았다. 새벽에 대원 한사람씩 호명을 당하여 끌려 나가자 광목으로 생선두릅 엮듯이 포박했다.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장릉 보덕사 앞을 지나 약 300m 정도 걷다보니 포박된 상태에서 박종수 대원의 바지가 반쯤 내려가 밟히면서 행군 속도가 늦어지자 대건으로 온몸을 마구 찔러 죽이는 만행을 저질러 일종의 경고성 위협을 하였다.
이 와중에 이운학씨가 바로 앞에 있는 김세진 대원의 포승을 풀어 인민군이 한눈파는 사이 산등성이 쪽으로 도망갔다.
기관총을 난사하였으나 실패하자 대원을 일렬로 서게 한 다음 눈에 핏발을 세우고 우리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다행스럽게 실탄이 떨어졌으며 인민군들은 모두 죽은 것으로 알고 소나무 가지로 덮었다. 누군가 살려달라고 소리치니 다시 와서 대검으로 마구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치는가 싶더니 철수했다.
이때 김경우 대원은 우측 좌골을 관통 당했고 이명준 대원은 손과 목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이운학 대원이 입으로 포승을 풀어주고 김기완과 송대희의 포승도 풀어 주었다.
김성내 대원(스님)은 복부의 상처로 창자가 나와 살기 어려웠으며 송대원 대원은 산비탈로 뛰어가다 소나무를 끌어안고 죽었다.
생존자 중 마차에서 끌려온 성명 미상의 의용군이 생명의 은인이라며 꼭 찾아뵙겠다고 헤어진 후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일 나이어린 연락병 송대희(15세)는 대검에 엉덩이를 찔려 그 고통으로 걷지 못하자 회초리로 때려가면서 길을 재촉하였다.
영월 삼거리(문곡)에서 보니 인민군의 긴 행렬이 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외딴집 아줌마에게 밥을 청해 얻어먹고 고개를 넘어 어떤 집에서 재워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헛간에서 자게 되었는데 주인이 미안했던지 이불을 가져다주었으며 아침과 신발까지 준비해 주었다.
배일치재를 넘어 뱃말(광전2리)에 도착하니 마을 청년들이 배로 건너 주었다. 고갯마루(방울재로 생각 됨)에 당도하니 전쟁이 끝났으니 안심하라며 격려해 주었다.
군등치 넘어 좌편에 당도하니 퇴각하는 인민군 1개 중대가 쉬고 있다가 우리를 불렀다.
영주에서 폭격을 만나 몸을 다쳤다고 둘러대니 원주에 가서 치료해 주겠다며 동행을 명했다. 이때 공습이 있어 수수밭으로 피하는 사이 위기를 모면했다.
주천(군우터)에 와서는 평창경찰서에 근무한다는 순경으로부터 검문을 받았으나 주민 김장식씨의 해명으로 치료에 보태 쓰라며 20원까지 주었다.
생존자 중
이명준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예비군에 해당되는 ‘청방’모병이 있어 12월 16일 자원하여 인민군 6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1952년 9월 19일 자원입대 했으며,
송대희 대원은 그때의 악몽으로 알코올중독 상태이다.
김세진 대원은 얼마 전까지 이곳 법흥리 선산에 성묘를 왔으나 지금은 소식이 없다.
대부분의 시신은 영월 장릉 보덕사 앞산 일명 ‘송장골’에 묻혀 있어 이를 안타까이 여긴 법흥사(주지 김도완)에서는 유족과 친지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혼이나마 좋은 세상에 오르도록 천도재를 올려 1998년 9월 5일 회향식이 있었다.

 

증인
1. 수주면 법흥리 ‘박 정 래‘
   6.25 때 법흥사 주지였던 김준상 스님의 상좌 김성내 스님이 결사대원으로 참여 하였다가 영월서 총살당하였다.
2. 수주면 법흥리 ‘이 재 호‘
활약상을 눈여겨 보아왔으며 5촌 당숙 ‘이강진‘ 또한 총살당하여 영월 소나기재에 암장되었는데 도로 확장시 행방이 묘연하다.
3. 영월읍 영흥 12리 2반 ‘장릉 보리밥집’
신용이(67세). 6.25 때 법흥 결사대원 및 마차 의용군 외 많은 젊은이가 보덕사 앞에 묻히어 지금도 이곳을 “송장골”이라고 부른다.


유고내용


총살당한 대원 16명 ()본관. 0 묘소

송대성(은진)
박종수
신재극(영월)
신순세(영월).신순봉(영월).신평수(영월) - 3형제
서석근
김농녹(*김장녹 의 오타인듯 함)
김성내(광산) 스님
김 경우
이상진
이진석
이강진(전주)*영월
유기종(강릉)
김삼용
유원산(강릉)


법훙에서 탈출한 대원 5명
안기봉(순흥) 0 법흥리
김돌봉(광산) 0 법흥리
이흥수(전주)
김성원
유태산(강릉) 0 법흥리
영월에서 탈출한 대원 6명
이명준(생존)
김기완
송대희(생존)
김세진
이운학
유천준(강릉)
*대부분 총살 및 타살 당한 후 현장에 암장

 

3. 맺음말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백척간두에 처한 조국의 꺼져가는 운명을 보다 못해 의연히 일어선 법흥결사대.
군번없이 목숨을 던진 송대성 외 15명의 영령과 그때의 상처로 어렵게 살다 가신 안기봉 외 9인의 영혼과 생존해 계신 이명준. 송대희 님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이들의 활약상을 전가에 기록하여 호국의 지정하고 위령탑이라도 건립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끝-

 

 

 

 

법흥리 27인의 용사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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