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선암(邀仙岩)·요선정(邀仙亭) <지방문화재 자료 41호 >
무릉리와 도원리 사이로 사자산 낙맥 끝자락에 형성되었다. 백덕산과 태기산에서 내리는 물들이 요선암의 절벽 밑에서 하나가 되어 주천강을 이룬다. 요선암은 억겁 세월의 흐름 속에서 물결에 깎인 화강암이 여러 가지의 기묘한 형상을 한 채 주위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이곳을 요선암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조선 중기의 유명한 풍유가로 평창과 강릉부사를 지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이곳 경치에 반하여 선녀탕위 바위에다 '요선암(邀仙岩)'이라는 글씨를 새겼는데 지금도 흐릿하게 그 흔적이 남아있다.
요선암 산봉우리에는 석가 여래 좌상인 마애석불(높이 7m, 넓이 3m)이 타원형의 양감이 풍부한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가득 머금은 채 무릉계곡을 굽어보고 있으며, 그 앞에는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에 범어(梵語, sanskrit)가 기록된 5층청탑이 있다. 요선암은 통일신라 말기 5교 9산 선문(禪門)의 하나인 흥령사의 안내 역할을 하는 암자로 주천리 강나루에 있는 3층석탑, 무릉리 나루터의 3층석탑과 함께 이정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절집은 폐허가 되었다. 지금은 이곳 요선정(邀仙亭)에 숙종, 영조, 정조임금의 친필 어제시(御劑詩)가 보관되어 있다. 1913년에 수주 요선계(이씨, 원씨, 곽씨)에게 정자를 건립하고, 주천 청허루에 보관중 방치되어 온 어제시현판을 가마로 모셔와서 지금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
1929년 주천 면장인 엄경렬(嚴敬烈)씨가 주천 보승회(保勝會)를 조직하고 빙허루를 복원하면서 수주면 요선계측에 어제현판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결국은 법정 소송문제로 비화되어 경성 지방법원 원주지청에서는 22년 동안이나 어제현판을 관리, 보관해온 수주면 요선계측에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때 주천에서 현판을 찾아가 빙허루에 보관했었다면 6.25사변때 빙허루의 소실과 함께 영원히 없어졌을 것이다. 그후 주천에서는 심명보의원이 중심이 되어 빙허루를 복원하고 요선정의 어제 현판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다.
숙종대와 어제시
憑虛淸虛兩樓詩一律病裏吟議 見會原州牧使?廷輔仍賜酒饌
빙허, 청허, 양루를 읊는 시는 병(病)중에 읊으신 것으로 원주목사 심정보에게 내리고 술과 안주도 내리셨다.(영조가 부왕 숙종이 읊은 시를 친필로 쓴 후 주천에 내림)
듣건대 주천에 두 누각이 있어
오랜 세월에도 그대로일세
높고 높은 석벽은 구름에 닿았고
맑은 강물은 질푸르게 이어 지도다.
숲속에는 아름다운 산새 우짖고
봄날 들꽃은 뜰 아래에 비추네
술가지고 올라가 아이로 하여금 따르게 하니
취하여 난간에 기대여 낮잠이 드네.
病子(1720년) 正月二十八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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