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역사 유적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독립운동사

心 鄕 2007. 3. 7. 19:46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3.1운동사

3.1 운동비사
발행자 : 이교헌, 시사시보출판국
원본복사일 : 단기 4292년 10월 1일
지료보관처 : 국회도서관
자료내용 : 3.1 운동사
제출자료형태 : 원본확대복사
제출자 : 전수길의 자 전운표

 

-951- 강원도
주천,수주 양면에서는 3월 24일 수백명씩 면사무소앞에 집합하여 만세를 불렀으며 각 부락에서 밤마다 산에 불을 놓고 계속적으로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제지를 당하고 10여인이 검거되었다

 

 

한국민족운동사료 중 3.1운동편
발행자 : 일본외무성 육해군성문서
원본복사일자 : 1987년 2월 10일
자료보관처 : 국회도서관
자료내용 : 3.1 운동사 (중 강원도 운동사)
제출자료형태 : 원본복사(영월군 제출 서류복사)
제출자 : 전수길의 자 전운표

 

254. 강원도 영월군수가 금마리에서 운동자에 포위된 사건에 관해 전보 (아조 ->대신)
강원도
21일 영월에서 약 70의 폭민이 순시중의 군수를  oo폭행하였으므로 수비대가 협력하여 주모자를 00하고 해0시키다


254. 밀수제 102호 23일 오후 4시5분발 4월 23일 오후 8시 10분 착
육군대신 앞  발신자 아 조
21일 강원도 영월군수가 민심지도를 위해 양변면에 출장하여 금마리에서 70의 폭민에 포위되어 독립만세를 和唱(화창)할것을 00 당하여몸을 때쳐 00하다. 수비병과 협력 0계중이다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Ⅰ)
1991년 8월 15일 발행
편자 :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발행인 : 류연익
발행처 : 광복회 강원도지부
자료보관처 : 국회도서관
제출자료형태 : 원본확대복사
제출자 : 전수길의 자, 전운표

 

영월군 : 영월군에서는 천도교도인 천선재가 추진하던 만세운동과 엄정훈 등 보통학교 성도들이 추진하던 만세운동이 사전에 탄로되어 실패하였고, 양변면 금마리의 유학자가 주동한 만세운동이 있다.
만세운동은 박광훈. 이용헌. 이병익. 박수영. 박재호에 의해서 수립되었고 이들은 처음에 주천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영월군수 석명선이 마을에 강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강연장에서 시위를 하기로 결정한 후 만세연명부를 작성하며 준비하였다.


그들은 4월 21일 군수가 강연하러 왔다가 돌아갈 때 주민을 모아 군수의 길을 막고 강제로 만세를 부르게 하였으며, 만세연명부에도 서명하게 한 후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 중 3권
발행일자 : 1992년 8월 15일 발행
저자 : 이구용. 최창희. 김흥수
발행처 : 광복회 강원도지부
자료보관처 : 국회도서관
자료내용 : 강원도의 3.1 운동사
제출자료형태 : 원본확대복사
제출자 : 전수길의 자, 전운표

 

364  강원도의 3.1운동
13. 영월군의 3.1운동
영월지방은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어서 천도교인이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산촌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집단으로 결속되지는 못하였다.


회성군 정곡면 안흥리의 천도교인 천선재 노인(농업 78세)이 4월 11일 영월군 주천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4월 8일에는 수주면 법흥리의 최춘일(崔春日)을, 9일에는 양변면 신일리의 최성오(崔成五)를 찾아가 같이 힘을 합쳐 시위를 일으키자고 모의하였다.


그는 10일에는 수주면 무릉리 부근의 밭에서 현성준(玄聖俊)을 만나, “근래 전국각지에서 애국의 지사가 번갈아 일어나서 대한독립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고 활동하고 있는데 특히 전번 횡성군 읍내 시장에서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기 때문에 수비대에게 사격되어 5명이 죽고 8명의 부상자를 내기가지 하였다.

그런데 우리지방에서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는 것은 유감되는 일이다. 한국 국민된 자 애국심을 분발하여 오는 주천리 장날 아침에 이 시장에서 나를 위시해서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려고 하니 이에 참가하라” 고 권고 하였다.


그러나 영월군내의 수개면을 돌아다니며 민중을 선동하던 천선재(千善在) 노인이 체포되어 주천장날의 시위는 실패하였다[독립운동사 제 2권 p594.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 5집 p955~956. 천선재 노인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영월보통학교의 4년생 엄정훈(嚴廷勳)이 중심이 되어 2년생 장준영(張俊永)의 집에서 시위계획을 추진하였다


영월읍 남쪽 합수(合水)거리에서 보통학교 생도들이 모여 만세 시위할 계획이었는데, 4월 15일 탄로되어 이 계획도 실패하였다[독립운동사 제 2권 p594~595]

 

양변면 금마리에서는 3.1 운동 전에 양변면장을 역임하고 마을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박수창(朴受昌)의 집에서 그의 아들 박광훈(朴光勳 농업 38세)이 4월 20일 오전 9시경 처남 이용헌(李容獻 농업 33세)과 이병익(李炳翼 농업 29세). 박수영(朴受永 농업 50세). 박재호(朴在鎬 농업 35세) 등과 함께 시위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대한독립만세운동이 치열히 전개되고 이웃 고을에서는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데 자극받아 자기 마을에서도 이민을 집합시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였다.


박수창의 손자인 박춘희(朴春喜 21세)와 김창진(金昌鎭). 박수찬(朴受燦)은 태극기를 만들었다.
박광훈 등은 원래 주천장터로 가서 시위하려고 계획하였는데, 4월 20일에 영월군수 석명선(石明瑄)이 농사강화 때문에 수행원과 함께 동리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이용하여 강연장에서 군수일행으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박광훈의 발의에 의하여 독립만세를 함께 부른다는 승낙서에 날인한 주동자들은 아래 윗마을을 다니면서 박수경(朴受景 농업 53세). 박수항(朴受恒 농업 28세). 박수조(朴受祚 농업 36세). 박수동(朴受東 농업 36세). 탁은상(卓殷相 농업 40세. 재판기록에는 34세). 탁원근(卓源瑾 농업 40세). 남상은(南相殷 농업 34세). 원하현(元夏鉉 농업 42세). 전수길(全壽吉 농업 25세). 조종협(趙鐘協 농업 38세). 홍봉관(洪鳳官 농업 28세) 등을 만나 만세연명부(萬歲連名簿)에 서명케 하는 등 철저히 계획을 추진하였다.

 

석명선 군수가 20일에 오지 않고 이튼날인 21일에 동리에 왔다.
21일은 주천 장날이었다. 주동자들은 군수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장에 가는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오전 11시경 구눗가 당나귀를 타고 군주사 민범식(君主事 閔範植), 면서기 지형태(面書記 池亨泰)와 같이 금마리에 도착했다.


군수는 마을 지도자 박수창에게 ‘만세반대자명부‘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박수창은 이를 거절했다. 옥신각신하는 중에 군수가 타고 온 당나귀를 누군가 끌고 군중이 모인 곳으로 데려갔다.
박광훈, 이병익, 이용헌, 박수영 등이 3,4십명의 군중을 이끌고 쫒아가서 금마리에서 주천리로 가려던 군서기, 면서기, 구장 등 일행을 조상근(趙相根) 집 앞에서 길을 가로 막았다.
박광훈, 이병익, 이용헌 등 5,6명은 3,4척 길이의 몽둥이를 가지고 군수 일행을 둘러싸고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해치워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들은 군수에게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손에 쥐어주며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였다.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박광훈 등의 강요로 군수가 태극기를 높이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2백여명의 군중이 연달아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이병익이 만세연명부를 내놓으며 군수에게 서명 날인하라고 강요했다. 군수가 연필로 서명하여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자 박광훈이 수첩을 내놓으면서 이것을 바치고 똑똑하게 쓰리고 요구했다. 군수는 시키는대로 다시쓰고 엄지손가락으로 날인하였다. 군중들은 일제의 앞잡이라고 조롱도 하였다.

 

군수가 돌아간 뒤 저녁 때 주천헌병파견소에서 헌병이 보조언 조병욱(趙炳旭)과 보병 5명을 인솔하고 금마리에 도착하였다. 일제관헌은 만세연명부를 압수하고 주동인물 박광훈 등을 체포하여 총과 몽둥이로 구타하였다.


그날밤 23명이 붙잡혀가 주천헌병파견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17명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박광훈, 이병익은 각각 징역 1년, 이용헌. 박재호. 박수영은 각각 징역 8월, 박수항, 박수경, 박수조, 이용규, 원하현, 남상은, 탁원근, 홍봉관, 전수길은 각각 징역 6개월, 탁은상, 조종협,박수형은 각각 무죄로 판결받았다[독립운동사 자료집 제 5집 p964~967. 독립운동사 제2권 p595~596. 한국민족운동사료 三 p318]

 

일제의 헌병사령부 기록에 영월군의 총 검거자가 69명이었다는 것을 보면 영월군에서는 금마리 외에 다른곳에서도 만세시위 등이 전개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월지방에서는 당시 금융조합의 대부금 회수가 예상보다 훨씬 성적이 좋지 않았다. 返濟(반제)하는 자가 적은 원인은 채무자들이 일반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가능하다고 믿고, 한국이 독립하면 일본인 경영의 금융조합은 당연히 파산. 소멸되는 운명에 이를 것을 생각하고 이를 갚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영월지방에서는 곧 독립이 될것으로 예상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한국민족운동사 三 p484. 조선독립운동 I p696]

 

 

독립운동사 제1권 ~10권 중 제2권 3.1운동사(상)
편찬 :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발행 : 독립유공자 사업기금 운용위원회
자료보관처 :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제출자료형태별 : 원본확대 복사
제출자 : 전수길의 자, 전운표

제4편 강원도의 운동 p594~596

 

제 4절 영월군
영월군의 만세운동은 보통학교 생도와 천도교인이 추진하던 것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당시 양변면 금마리에서 유학자가 주동한 운동이 계획대로 전개되어 기록에 남아있다

 

1. 천도교도와 보통학교 생도
영월군의 산촌에는 천도교인이 많이 살았다.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어서 그의 영향을 받아 교인이 많았으나 산촌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집단의 힘으로 결속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천도교인 천선재(千善在)는 78세의 노인으로 여러 마을을 순회하면서 힘을 모으려고 했다 .그가 계획한 것은영월군 주천 장날인 4월 11일 만세운동을 전개하려고 당시 수주면과 양변면의 마을을 순회했는데, 수주면 무릉리에서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계획도 실패했던 것이다[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년 5월 2일, 천선재의 것, 판결문철 제13책 p582 참조]


그 후 수주면과 양변면은 통합되어 주천면으로 불리고 주천 장날은 1일과 6일이었다.
보통학교 생도가추진하던 만세운동은 영월읍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당시 보통학교는 향교에 있었는데 2학년 장준영(張俊永)의 집에서 엄정훈(嚴廷勳)을 중심으로 계획하였다. 엄정훈은 당시 4년생 이었고 20여 세의 청년이었다. 계획은 영월읍의 남쪽 합수(合水)거리에서 학교의 생도들이 모여 시위할 계획이었는데 추진중 4월 15일 탄로되어 실패했다[① 증언자(1970년 11월 6일). 엄경준(嚴坰俊. 75세) 영월읍 하송2리 ②<조선 소요사건 상황> p 506 참조]

 

2. 금마리의 운동
금마리는 제천에서 30리 정도 떨어져 있는 영월군에서 가장 서편의 마을이다. 지금은 주천면으로 불리우지만 당시는 주천면, 남부면, 양변면 이었기 때문에 양변면 금마리로서 당시는 박씨(朴氏)의 문중 마을이었다. 3.1운동 전에 양변면장을 지낸 박수창은 이 마을의 실질적인 주관자였고 , 당시 구장은 원달현(元達鉉)이었다.


만세운동의 계획은 박수창의 집에서 그의 아들 박광훈과 박광훈의 처남 이용헌, 그리고 이병익. 박수영. 박재호에 의해서 수립되었는데 당시 21세였던 박수창의 손자 박춘희. 김창진, 박수찬은 태극기를 만들었다.


한편 4월 20일 영월군수 석명선이 이 마을에 강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원래는 주천장터로 가서 운동을 펴려고 했던 것을 변경하여 강연장에서 군수와 같이 시위하기로 결정한 후, 박수경. 박수항. 박수호. 탁원근. 남상은. 이용규. 원하현. 전수길.홍봉관 이 아래 윗 마을을 다니면서 만세연명부를 작성하였다. 이 명부가 압수되어 이 마을 사람들은 특히 고초를 겪었지만, 이렇게 철저히 계획하여 추진한 것인데 4월 20일 군수가 오지않고 이튿날 21일에 왔다.


21일은 주천 장날 이었다. 군수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주동 인물들은 장보러 가는 사람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 때(오전 11시경)군수가 당나귀를 타고 군 주사 민범식과 면서기 지형태를 수행시켜 마을에 도착했도, 군수는 마을의 원로 박수창에게 ‘만세반대자명부‘에 서명 할 것을 요구했다. 박수창은 이를 거절하고 여기서 옥신각신 하던 동안 군수가 타고 온 당나귀를 누군가 끌고가서 군중이 모인곳으로 데려갔고 군수의 일행도 군중 앞으로 왔다. 여기서 군중은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고 만세 연명부에 서명케 했다.


민범식 지형태도 서명하고 만세를 불렀지만 군수가 태극기를 들고 부르는 만세소리를 따라 2백여 군중도 연거푸 만세를 부르고 또 군수를 일제의 앞잡이라고 조롱도 하였다.[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년 5월 19일 박광훈 외 16명의 것(판결문철 제16책 p198) 참조]

 

군수가 돌아간 뒤 저녁 때쯤 주천 헌병파견소에서 대장 중굴(中堀)이 보조원 조병욱(趙炳旭)과 보병 5명을 인솔하고 왔다. 금마리의 참변이었다. 주동인물 박광훈을 비롯하여 체포자를 모아 놓고 보병은 주민을 향해 총을 겨누고 헌병과 보조원은 체포자를 총과 몽둥이로 구타하니 눈뜨고 못볼 광경이었다[관계증언자 1970년 11월 8일 박춘희(朴春喜 72세. 주천면 금마1리 1100). 탁연한(卓然漢 66세. 주천면 금마1리 1063)]

 

그 후 주천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은 인원은 헤아릴 수 없지만, 재판을 받은 사람이 판결문에 나타난 것으로 17명이다.


그런데 일제측 기록에 이 날의군중을 70명이라고 나타냈는데[김정명<조선독립운동 I>p646 참조]
증언자의 이야기는 이 날이 주천 장날이었고 장보러 가는 사람을 모았기 때문에 수백명이라고 한다.


또다른 일제측 기록에 체포자가 7명이라고 수록되어 있는데[<조선독립운동 I>p663 참조] 그날 밤 잡혀간 인원이 23명이라고 증언하며 재판기록에 17명이 올라 있으니 일제측이 조작한 것이다.


그리고 일제측 소위 헌병사령부의 기록에 영울군의 총 검거자 수가 69명이었다고 하는것을 보면[조선헌병사령부<조선 3.1운동 소요사건 상황>p446 참조] 금마리의 운동 외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한다든지 혹은 어떤 선전활동을 하던 사람이 많았던 것이 확실하다.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 1집 ~14집 중 제 5집 3.1 운동 재판기록
발행자 : 독립운동 편찬위원회
자료보관처 :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자료내용 : 1919년부터 1921년 사이 기소판시 된 3.1운동관계 형사사건 판결문
자료제출 형태 : 원본 확대복사
제출자 : 전수길의 자. 전운표

독립운동사자료집
제5집
3.1운동 재판기록 제4편 강원도 961쪽 ~ 968쪽

 

판결
영월군 양변면 금마리
       농업 박광훈(朴光勳) 38세
동소 농업 이병익(李炳翼) 29세
동소 농업 박수경(朴受景) 53세
동소 농업 박수항(朴受恒) 28세
동소 농업 박수영(朴受永) 50세
동소 농업 박수조(朴受祚) 36세
동소 농업 이용헌(李容獻) 33세
동소 농업 탁은상(卓殷相) 34세
동소 농업 탁원근(卓源瑾) 40세
동소 농업 남상은(南相殷) 34세
동소 농업 박재호(朴在鎬) 35세
동소 농업 이용규(李龍奎) 37세
동소 농업 박수동(朴受東) 36세
동소 농업 원하현(元夏鉉) 42세
동소 농업 전수길(全壽吉) 25세
동소 농업 조종협(趙鐘協) 38세
동소 농업 홍봉관(洪鳳官) 28세

위 보안법 위반 피고 사건에 대하여 조선총독부 검사 옥명우언(玉名友彦) 입회하에 다음과 같이 심리 판결한다.

 

주 문
피고 박광훈. 이병익. 이용헌을 각 징역 2년에,
피고 박재호. 박수영을 각 징역 1년 6월에,
피고 박수경. 박수조. 탁은상. 탁원근. 남상은. 이용규. 박수동. 원하현. 전수길. 조종협. 홍봉관을 각 징역 1년에 처한다.
압수된 독립만세 연명부(증 제 1호) 구 한국 국기(증 제 2호)는 이를 몰수한다

 

이 유
피고 박광훈. 이병익, 이용헌 박재호. 박수영은 천도교주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 이래 조선 각지에서 조선독립 시위운동이 치열해진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피고 등이 사는 마을에서도 이민을 집합시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기도하고
대정 8년 4월 20일 피고 박광훈 집에서 동인의 발의로 그 취지를 협의하고
또 영월군수 석명선(石明瑄)이 그 수원과 함께 온 것을 다행으로 하여, 동 군수 일행으로 하여금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게 한 것을 모의하고 그 뒤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방법에 대하여 피고 등 이외의 다른 피고 등의 찬동을 얻음으로써
그 다음 21일
피고 박광훈. 이용헌. 이병익 등은 위의 피고 등과 함께 농사강화 때문에 동리에 출장중인 영월군수 석명선 등 일행 수명이 위 강화를 마치고 다른 촌으로 향하여 동리 제천 가도로 가는 그 앞길을 막고 박광훈은 몽둥이를 가지고,
피고 이병익은 손에 가졌던 구 한국 국기를 군수의 손에 쥐어주고
피고 박광훈은 동 군수에 대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고 은근히 위해를 가할 것을 예고하고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강요하여 군수 일행으로 하여금 할 수 없이 수회에 걸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피고 등 일동도 이에 의하여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그리고
피고 이병익. 박광훈 등은 동 군수에 대하여 이병익이 가졌던 압수된 독립만세명부에 서명 날인을 강요하여 동 군수로 하여금 부득이 이에 서명 날인하게 하여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

이상의 사실은 피고 등의 당 공정에서 ‘손병희 등이 대정 8년 3월 1일<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 조선 각지에서시위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는 공술,

 

피고 박광훈의 당 공정에서 ‘동년 4월 21일 피고의 마을 제천 가도에서 영월군수 외 수십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는 공술

 

피고 이병익의 당 공정에서 ‘동년 4월 20일 오전 9시경 나와 피고 이용헌. 박수영. 박재호 외 1명이 합석해 있을 때 피고 박광훈은 “이웃 고을에서는 모두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데 우리들도 구 한국 신민으로서 만세를 외칠만한 의무가 있다.

행으로 군수가 온다고 하므로 군수에게 권고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자” 하였는데 일동이 모두 이를 찬동하고 박광훈의 발의에 근거하여 괘지에다 박영훈 집에서 피고 등으로부터 독립만세를 함께 부른다는 승낙서로서 증 제 1호와 같이 날인을 받고 그 다음날 오전 11시경 군수. 기타 수원에 대하여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권고하고 함께 외쳤다.
군수에게 만세를 강요할 무렵에 박광훈이 솔선하고 이어 이용헌이 여기에 쫒아 군수가 떠나는 뒤를 쫒아 마을 조성근 집 노상에서  앞길을 막고 군수에게 만세를 외치라고 강요하고,
나는 군수의 손에 내가 만들어 둔 압수 2호의 구 한국 국기를 쥐어주게 하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는 사실의 공술

 

피고 박수경의 당 법정에서 “증 제1호의 압수문서는 피고 이병익이 이에 날인해 달라고 말 하므로 날인한 사실이 있어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자기는 독립만세를 군수 기타가 부르고 있을 때 구경하고 있었다“ 는 의미의 공술,

 

피고 박수항의 당 공정에서 “대정 8년 4월 20일 피고 이병익. 박광훈 등으로부터 권고를 받고 군수 석명선 외 수원 3명에 대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권고하고 함께 만세를 외친 사실이 있었다.
그리고 동인 등의 권고에 의하여 미리 찬성한 의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증 제1호의 서면에 날인한 사실이 있고 그 다음 21일에 피고 박광훈 등이 마을 제천 가도에서 영월군수 석명선 외 수원에 대하여 조선독립만세 고창을 강요하고, 우리들은 군수와 함께 만세를 외쳤다“는 사실의 공술,

 

피고 박수영. 박수조의 당 공정에서 앞서와 같은 내용의 공술,

 

피고 이용헌의 당 공정에서 “대정 8년 4월 20일 피고 박광훈 집에서 박광훈은 이 집에 모여있던 우리들에 대하여 ”각 군은 조선독립을 외치고 있는데 우리 마을에서도 만세를 불러야 한다“ 고 했다.
그리고 영월군수가 오므로 함께 만세를 외치려 하매, 여기에 찬동하며, 그 취지의 서약서에 서명 날인하고 
다음 21일 동인 등과 함께 제천 가도에 이르러 군수와 수원이 마을로부터 주천리로 향할 무렵 박광훈 등은 그 앞길을 막고 꼭 조선독립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가요하고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서약서는 증 제 1호이다“는 사실의 공술,

 

피고 박재호. 원하현. 박용규. 전수길의 당 공정에서 앞서와 같다는 취지의 공술,

 

피고 탁은상의 당 공정에서 “대정 8년 4월 20일 피고 박광훈. 이병익 등으로부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할 것을 권고 받고 이를 승낙하여 이병익이 제시한 증 제 1호의 서약서에 서명하였다” 는 사실의 공술,

 

피고 탁원근. 남상은의 당 공정에서 “4월 20일 피고 박광훈. 이병익 등으로부터 조선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권고 받아 승낙하고 이병익이 가졌던 증 제 1호의 서약서에 날인 하였다”는 사실의 공술,

 

피고 박수동의 당 공정에서 “대정 8년 4월 20일 나는 박광훈.이병익 등으로부터 영월군수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권고 받고 증 제 1호의 서면에 날인한 사실이 있다” 는 공술,

 

피고 조종협. 홍봉관의 당 공정에서 “4월 20일 나는 박광훈. 이병익 등으로부터 영월군수 등을 강요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권고하고 또 이병익의 요구에 의하여 증 제 1호의 서면에 날인한 사실의 공술,

 

사법경찰관의 피고 박수경 심문조서 중 “4월 21일 군수 일행은 마을로부터 주천리 방면으로 가려고 함에 있어서 이민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른다고 하여 군수의 뒤를 쫒고 나도 술김에 함께 갔었는데 피고 이병익. 이용헌이군수와 담판하여 국기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므로 나도 함께 불렀다”는 사실의 공술.

 

동 상 피고 박수항 심문조서 중 “4월 21일 군수. 군서기. 구장.면서기 등을 데리고 마을로부터 주천리로 향하고 조상근(趙相根) 집 앞에 으르니 피고 박광훈. 이병익이 와서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지 않아서는 아니된다 하고 군수에게 강요하여 구 한국 국기를 군수에게 건네주므로 군수는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박광훈. 이병익. 이용헌 등에게 강요되어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나도 이에 응하여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는 사실의 공술,

 

동 상 남상은 심문조서 중 ‘ 4월 21일 군수는 마을로부터 주천ㄹ 방향으로 가려고 하여 조상근 집 앞에 까지 왔었는데 이병익 등이 이민 약 30명과 함께 군수 뒤를 쫒아가고 이병익. 이용헌이 군수 앞에 서서 가로 막았는데 군수는 구 한국 국기를 높이 휘두르고 만세를 불렀으며 나와 탁은상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는 사실의 공술,

 

동 상 피고 박재호 심문조서 중 “이병익. 이용헌. 박수영 등 3명이 선두에 서서 이민 30명 가량을 거느리고 군수 앞을 가로 막고 이병익은 군수에 대하여 함께 만세를 불러 달라고 강요하여 군수 일행으로 하여금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으며, 우리들도 함께 불렀다”는 사실의 공술.

 

동 상 피고 박수동. 조종협. 탁원근에 대한 각 심문조서 중 “4월 21일 군수가 만세를 부를 무렵 나도 일동과 함께 불렀다” 는 사실의 공술,

 

동 상 피고 석명선 심문조서 중 나는 4월 21일 영월군 양변면 금마리에서 강화를 한 뒤에 주천리로 향해서 5,6간 쯤 전진한 무렵

피고 박광훈 외 3,4십명의 군중이 뒤로부터 쫒아 와서

 박광훈 외 4,5명이 3,4척 길이의 몽둥이를 가지고 우리들 일행을 둘러싸고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해 치워 버리겠다고 위협하고

그 중의 혹자는 종이로 만든 한국기를 내 손에 쥐어 주며 억지로 만세를 부르라고 하므로

나는 부득이하여 독립만세를 불렀었는데 집합한 일동도 여기 화해서 외쳤었다.
그리고 그 뒤 이병익이 연명부를 내 놓으면서 나에게 대하여 서명 날인하라고 하매 나는 연필로 서명하였더니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으므로 박광훈이 수첩을 내 좋으년서 이것을 바치고 똑독하게 써 달라고 하므로 이것을 쓰고, 엄지손가락으로 날인해 주었다“ 는 사실의 공술,

 

동 상 증인 민범식(閔範植)에 대한 심문조서 중 피고 박광훈외 박재호. 기타 2,3명의 사람이 몽둥이를 가지고 군수에 대해서 독립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해 치워 버리겠다” 고 위협하고 군수로 하여금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는 사실의 공술 및 압수된 독립만세 연명부 및 구 한국기의 현존함에 정하여 이를 인정한다.

 

법에 비춰보니 피고 등의 소위는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42조에 해당하고, 또 신법인 제령 제7호 제 1조에 해당하므로 피고 박광훈을 제외한 기여의 피고 등에 대해서는 형법 제6조. 제8조. 제10조에 의하고 신. 구 양법의 형의 경중을 대조하여 가벼운 구법인 보안법 제 7조에 의하여 피고 박광훈의 협박한 소위는 형법 제222조 제1항에 해당하고

보안법 제 7조 및 제령 제9호 제1조 위반의 소위와 모두 1개의 행위로서 수개의 죄명에 저촉이 되므로 각 형법 제 54조 제 1항 전단 제 10조에 의하여 순차로 무거운 보안법 제 7조, 제령 제7호 제 1조의 형에 따르게 하고
그리고 동 피고는 형법 제6조. 제 8조. 제 10조에 의하여 신. 구 양법의 형의 경중을 참조하여 가벼운 보안법 제 7조에읳여 피고 등은 각 기 소정형 중 징역형을 선택하고

그 형기 범위 내에서 형량을 처단하며

압수된 독립만세 연명부 및 구 한국기는 범죄의 공용물이므로 형법 제 19조에 의하여 처분한다.

그러므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정 8년 5월 19일
경선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 신정변

 

비고
동년 9월 24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원심을 취소,
박광훈, 이병익을 각 각 징역 1년,
이용헌. 박재호. 박수영을 각 각 지역 8월,
박수향. 박수경. 박수조. 이용구. 원하현. 남상은. 탁원근. 홍봉관. 전수길을 각각 징역 6월,
탁은상. 조종협. 박수동은 무죄를 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