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역사 유적

子規樓에서 길을 묻다/김은영 명예기자/희망영월4월호

心 鄕 2013. 4. 26. 23:57

 

 

 

子規樓에서 길을 묻다

                     김은영 명예기자

 

  열일 곱 살의 어린 왕. 치적(治績)이랄 것도 업적이랄 것도 없는 짧은 삶이 556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역사보다도 중요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 존재하고자했던 환란의 시대를 지나 지금의 우리는 보다 더 개인적이면서도 친밀한 최선의 가치를 쫓으며 살고 있다. 돈과 재미와 명상(수행)이 일상 속에서 함께 공존하는 시대, 나라와 개인이 그리고 역사와 나라가 분리된 시대를 걷고 있다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더욱 더 풍성해지는 단종 문화제를 함께하며 만감(萬感)에 젖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은 그래도 각자의 길을 역사에서 읽어내고 자하는 지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단종은 먼 길 따라 문안 들던 이들로 한(恨)을 달랬을 테고, 영월은 단종 임금으로부터 희망을 보았고 지금 우리는 지난 역사를 배우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사람의 길’을 묻고 있다. 


  단종께서 상왕의 신분에서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된 후, 눈물방울을 닮은 청령포에서 지내던 중 큰 홍수를 염려해 영월부 객사(손님 숙소)인 관풍헌으로 옮겼다. 옛 동헌 터는 모텔과 각종 음식점들이 자리 잡았는데 다행히 팔작지붕(옆면에서 볼때 여덟 八자 모양) 모양을 한 객사 세 칸은 남아 있다. 좌측(망경헌), 중앙(내성관), 우측이 관풍헌이라 불리는데 이곳에서 거처하셨다고 한다. 1457년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비운의 삶을 마감한 자리이며 영월이 찾고자하는 역사의 뿌리가 박혀있는 곳이다. 지금은 보덕사 포교당으로 활용되고 있다는데 어서 빨리 본연의 모습을 찾아 많은 이들이 알고 찾는 정신의 보고(寶庫)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단종은 관풍헌 끝자락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자주 올랐는데, 자규란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 하는 소쩍새를 이르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견준 것이다. 이 누각은 원래 매죽루(梅竹樓)라 불리었으나 단종께서 지으신 자규시(子規時)가 너무도 처절하여 영월 사람들이 슬퍼한 나머지 그 누각을 자규루라 이름 하였다. 이 누에 올라 근심을 달래다 보면 담장 너머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백성들이 있으니 먼 길을 마다않고 군에 들어와 자주 문안을 올렸다고 한다. 당장이라도 산머루를 따다 진상(임금에게 받침)하는 추익한 선생의 모습도 가물가물 아지랑이처럼 오를 것만 같다.

 


   왕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보잘 것 없다하는 백성들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는 것은 신분을 초월한 인간애(愛)일 것이다. 사리사욕에 눈멀어 살생이 들끓던 세월은 수많은 이들에게 측은지심과 정의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저마다 목숨을 걸고 지킨 이들의 크고 작은 의(義)로움은 이기심이 만연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배움이지 않을까. 과연 그네들이 지켜낸 것은 무엇일까. 단종? 신념? 아니면 자신일까. 이제 우리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안에서 개인적 삶에도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을 모색해보는 접근 방식을 취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잘 알고 찾아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 두자. 한 때는 영월 읍 한 복판에 위풍 당당히 서 있었을 자규루에 올라 단종의 애환을 느껴 보시길 바라며 이렇게 사적(史蹟)을 탐방한 후, 처음으로 ‘나는 세상 속에서 무엇을 지키며 살 것인가’를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