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남민기자의 천천히 걷는 감성여행
[테마있는 명소] 영월 낙화암--‘실존 춘향’ 영월 관기 경춘을 아시나요
[헤럴드경제=영월]1771년 어느 이른 봄날, 여느 때와 같이 열다섯 소녀 경춘(瓊春ㆍ본명 고노옥)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유난히 빼어난 미모는 늘 뭇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숱한 유혹을 뿌리쳐 왔다.
경춘은 어린 나이에 사고무친(四顧無親), 막 관기(官妓)가 된 신분이었지만 늘 몸가짐을 바로 했다.
그 해 정월 영월부사로 부임한 이만회(李萬恢)를 따라 내려온 아들 시랑(侍郞) 이수학(李秀鶴)이 경치좋은 금강정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다 건너편 경춘의 미모에 눈길이 멈췄다. 그 역시 첫 눈에 반했다.
수학은 나룻배의 노를 저어 건너갔다. 마주한 두 남녀, 설레는 가슴으로 수학이 고백했다. 그리고 백년가약을 했다. 경춘도 뿌리치지 않았다. 이후 둘의 사랑도 점점 무르익어 갔다. 경춘은 마침내 수학에게 처음으로 몸을 허락하게 된다.
영월의 낙화암과 말없이 유유히 흐르는 동강. 앞쪽 정자는 금강정이고 사진 오른쪽 끝 절벽이 낙화암이다.
절개를 지키려 목숨과 바꾼 꽃다운 사람들이 뛰어내려 주민들을 슬프게 했다.
달콤했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이듬해 영조48년 7월29일 문신들을 조정에 불러들이는 전교를 받고 이만회가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수학도 경춘과 이별을 고하게 된다. 수학은 떠나기 전 ‘입신(立身)해 훗날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의 글을 써서 경춘에게 정표로 남겼다.
경춘은 언제나 품에 안고 기다렸다.
그 해 10월21일 새로 부임한 부사 신광수가 경춘의 미모에 반해 수청 들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경춘은 수학과 백년가약을 맺은 정표도 보이며 부사의 청을 거듭 거절하다 수차례 걸쳐 추초(箠楚ㆍ볼기를 치는 형벌)를 받았다.
더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하루는 성복(盛服)을 하고 부사를 찾아 태연한 척 웃으며 말하기를, “며칠간 만 부름을 멈춰주시면 병난 몸 잘 추스려 원하는 바를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고 윤허를 받았다.
이튿날 아버지 묘소를 찾아 인사를 올리고 금장강(동강) 변으로 향했다.
동생 머리를 빗겨준 후 벼랑 위에 앉아 노래 몇 수를 부르니 눈물이 치마를 흠뻑 적시고 슬픔과 한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음을 정리한 경춘은 옆에 있던 동생을 달래 돌려보내고 한 송이 꽃으로 강물에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임진년 10월, 그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낙화암이 있는 금감공원 내의 금강정.
집안사람이 급히 달려가 건져올려보니 옷 속에 뭔가 꿰맨 자국이 있어 풀어봤다. 수학이 건넨 정표였다.
수청을 강요했던 부사 신광수는 이듬해인 1773년(영조49년) 12월에 영월부 감사 과정에서 교체됐다.
관기 경춘. 본명은 고노옥이다.
영월 선비 고순익(高舜益)이 자식이 없어 태백산 산신령에게 백일기도를 해 얻은 귀한 딸이다.
이곳에 유배온 단종임금(노산군ㆍ魯山君)이 점지해 준 소중한 자식이라 해서 이름을 노옥(魯玉)이라 지었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여덟살에 아버지 마저 돌아가시자 의지할 곳이 없어 어린 동생과 함께 이웃의 추월이라는 기생 수양딸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수양어머니도 연로해져 노옥은 경춘(瓊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관기가 된 경춘은 어렸지만 타고난 미모와 가무솜씨가 남달랐다.
춘향전, 아니 경춘전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이도령과 성춘향의 이야기와 이렇게도 똑같을 수가.
해피엔딩과 언해피엔딩만 빼면 전개되는 이야기가 완전 그대로다.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250년 전 강원도 영월 고을에서 있었던 실화다.
춘향전 보다 더 춘향전 같은 이 비련의 이야기.
영월 관기 경춘, 고노옥의 한맺힌 사연이다.
그 생생한 이야기가 비석에 새겨져 200년 넘게 그대로 전하고 있다.
영월 금강공원에 있는 낙화암, 필자가 찾은 날 오전 공교롭게도 보슬비가 내려 마음을 더 슬프게 했다.
16살 관기 경춘의 슬픈 사연을 담은 비석.
함께 투어에 나선 영월군청 김원식 선생님이 경춘이 뛰어내린 낙화암을 가리키고 있다.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殉節之處)’라고 새겨진 이 비석은 경춘이 동강 90도 절벽 위에서 뛰어내린 장소임을 알렸다.
옆엔 작은 낙화암 비석이 동병상련 벗이 돼 주고 있었다.
경춘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떨어진 자리에 1795년(정조19년) 8월 강원도순찰사 이손암(李巽菴)이 월주(영월)의 절행부를 살피던 차 이 이야기를 듣고 “천적(賤籍)의 몸으로 이런 일을 해내다니 열녀로다. 어찌 본으로 세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라며 자신의 봉급을 털어 영월군수에게 순절비를 세우도록 했다.
경춘이 죽은 지 24년 만이다.
평창군수 남희로(南羲老)가 비문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글씨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석의 높이는 109cm, 폭 47cm, 두께 14.5cm다.
이 비련의 경춘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뛰어내린 낙화암에는 그 보다 315년 먼저 또 꽃잎 처럼 떨어져 순절한 사람들이 있었다.
단종의 궁녀와 관리인, 종인 등 6명이 국명을 어기고 몰래 따라와 1457년 단종이 승하하자 이들을 비롯 총 90명이 낙화암에서 떨어져 목숨을 던졌다. 당시 동강에는 시신이 가득했으며 이날 천둥과 번개가 일고 강한 바람에 나무가 뽑혀나갔다는 기록도 함께 전해 내려온다.
슬픔에 빠진 주민들은 이곳에 낙화암을 설치해 넋을 기려왔는데 영조 18년(1742년) 영월부사 홍성보가 왕명을 받아 사당을 건립하고 민충사(愍忠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옆의 정자 금강정은 세종 10년(1428년) 김부항이 지었으며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장소다.
단종임금이 승하하자 낙화암에서 함께 순절한 궁녀, 시녀, 종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순절비.
옆의 작은 비석에 '낙화암'이라고 쓰여있다.
낙화암, 춘향전…
다른 고장에서 워낙 유명세를 타고 있기는 하지만 숭고한 절개가 깨알 같이 비석에 전해내려오는 영월의 경춘 이야기는 새삼스레 파릇파릇한 싹이 돋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채 피지도 못하고 진 16살 경춘의 마지막 자리, 그리고 그 낙화암, 그 비석이 외롭게 서 있는 금강공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영월읍내 번화가인 중앙로 동쪽 끝 지점 동강을 건너기 직전 왼쪽 영월향교 방면으로 접어들면서 골목길로 들어가면 금강공원이 있다. 동강의 절벽 위에 길게 펼쳐져 있는데 영화 ‘라디오스타’에 나왔던 방송국이 문이 닫힌 채 숲 속에 있다.
이 방송국은 군청에서 매입, 조만간 박물관으로 재탄생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 바로 아랫길로 접어들면 난고 김삿갓 시비(詩碑)와 남극 세종기지에서 순직한 전재규 의사 추모비가 있고 메타세콰이어 10여 그루 예쁜 길을 지나면 금강정과 민충사가 나온다.
금강공원 내 모습. 영화 '라디오스타'에 나온 방송국, 김삿갓 시비, 남극 세종기지서 순직한 전재규 의사 추모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준 정사종 충의비(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그곳에서 조금 지난 아래쪽 깎아지른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 비석과 경춘순절비가 나란히 서서 그 자리임을 알리고 있다.
영월 여행에서 뜻밖의 춘향전 원본을 발견한 느낌을 받았다.
함께 자리한 김원식 선생님과 엄기평 영월군청 문화관광과 계장께 어떻게 이런 애절한 실화가 이렇게 묻혀있었냐고 물으니, 영월하면 단종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라고 했다. 또 춘향의 스토리가 전라북도 남원이 본고장 처럼 각인된 것도 이유라고 했다.
하지만 영월은 설화도 전설도 아닌 250년 전 실화가 비석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고 주민들이 함께 슬퍼해 왔다는 점이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동강을 내려다 보며 산책하기에도 딱 좋은 곳이다.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을 만큼.
젊은 남녀의 애절한 사랑이 채 꽃 피우기도 전에 꺾인 16살 관기 경춘의 순정,
그 슬픈 사연이 감성이 메마른 현대인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고 있다.
금강정과 동강.
…………………………………
■ 경춘비(瓊春碑) : 비석 앞 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전면 원문) 越妓瓊春殉節之處 (‘영월 기생 경춘 순절한 곳’이라는 비문)
△(후면 원문)
越妓瓊春 故李侍郞莅越時 所眄以其初許身也 故欲自潔以守 及後官之來 衙內人有强之者 數被箠楚 殆不能堪一日盛服而入言笑自如曰 倘無數日呼喚 當調病軀 一聽所欲 翌朝遂往訣其父墳 歸爲諸弟梳 仍起往錦障江邊 坐於絶石崖歌數闋 泣下沾裳 悲恨不自勝時 稚弟在傍 乃詒而使之去 卽奮身投水死歲壬辰十月 其年十六家人奔往 拯之衣衿 有隱映物 裂縫視之 乃李侍 郞筆嗚呼其死也 視古之從容就義者何如哉 今都巡察使巽菴李公 以大冢宰出按關東節行部 過越州聞而奇之曰 以賤籍而乃能辨此此眞烈女也 烏可無樹風聲之道乎 遂捐俸屬越守俾立一片石識其處 又屬余記其顚末 余惟瓊春之死 距今爲二十四年 始得表顯之 微我公瓊春之節 其將湮沒而已也乙卯八月平昌郡守南羲老記 寧越府使韓鼎運書
■ 영월의 관광명소 : 영월은 조선 제 6대 임금 단종의 비애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고을이다.
단종이 3년 만에 왕위에서 사실상 쫓겨나고 영월로 유배를 옴으로써 단종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처음 유배를 떠나온 청령포와 두달만에 옮겨 간 관풍헌, 그리고 그의 애처로운 무덤이 있는 장릉까지 단종의 향기를 추적할 명소가 많다. 장릉은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돼 있다.
이밖에도 김삿갓 문학관, 한반도 지형, 법흥사, 동강, 서강, 어라연계곡, 고씨굴 등 명소가 즐비하고 별마로천문대를 비롯 조선민화박물관 등 박물관만 해도 20여개나 있는 고장이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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