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때 염초도회소(焰硝都會所)가 있던 마을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전경>
어느 마을이든 그 마을만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가 있다.
문서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왔다면 오늘날 더없이 귀중한 자료로써 마을만의 전통으로 이어받아 더욱 값진 모습으로 계승할 수 있지만, 기록이 있어도 세상에 알져지지 않고 지난 600여년동안 역사속에 묻혀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이다
금마리는 지난 1919년 4월 20일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영월의 역사적인 장소이자 마을주민의 저력을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이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근거자료를 1990년 시사월간에 '금마리 3.1독립운동사'를 발표하여 세상에 알리고 전문기관으로부터 인증을 받아 지난 1993년 금마리 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건립하게 된 근원이 바로 박충훈 선생(*주)이다.
영월문화원이 2006년 12월 30일 발간한 ‘내성의 맥 향토지 제22집’ 논단 기고문에서 선생은 “주천현에 염초도회소가 있었다“는 글을 발표하였다.
기고문에 의하면(146쪽 ~ 173쪽), 문종대왕 즉위년(서기 1450년) 9월 19일에 원주목 주천현에 염초도회소(焰硝都會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염초도회소란, 염초(焰硝)는 당시에 화약의 주 원료로 흙이긴 흙이나 부엌아궁이나 온돌 방 밑의 흙을 말하는 것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거나 군불을 땔 때 건물의 구들장 밑을 지나 굴뚝으로 나가는 통로를 통과하면서 나무를 소각할 때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바닥 흙과의 화학적 반응에 의한 결정체를 말하는 것으로, 그 맛이 짜기도 하고 달기도 하고 쓴맛도 있어 그 자체가 당시에는 화약의 원료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원료로 하는 화약제조공장이 곧 염초도회소로 이곳 금마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 원료를 얻기 위해서는 민가를 헐거나 반파라도 했을 때라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전국 6개 도에 25개소의 염초도회소가 설치되었는데,
강원도에서는,
삼척부을 1도회로 하여 울진,평해,강릉을 소속시키고,
양양부를 1도회로 하여 간성,고성,통천,흡곡을 소속시키고,
춘천부를 1도회로 하여 양구,낭청,인네,회양,평강,금화를 소속시키고,
주천현에도 1도회로 하여 정선,평창,영월,원주,횡성,홍천을 소속시켰다고 한다.
전국25개소 중에 1개소이자 강원도내 4개소에서도 주천지역에 정선,평창,영월,원주,횡성,홍천에서 굴취된 모든 염초가 집결되는 역사적인 장소가 바로 금마리이다.
영월군과 주천면으로서는 잊어버린 역사를 되찾게 되는 귀중한 자료이기에 1월 20일 금마리 현장을 찾아갔다.
아랫지마둔(지금의 금마2리)이 훤히 내려다보여 토성을 쌓고 지키던 곳이라는 사성계(沙城界.묘지의 둔덕처럼 작은 언덕을 쌓고 지키던 곳. 묘 뒤에 반달모양으로 두둑하게 쌓은 낮은 토성)을 찾았으나 흔적이 없었다.
<고인돌이 있던자리.3일동안 깨어서 마을길 석축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 사성계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굄돌거리’ 즉 고인돌을 보호하기위해 있었던 작은 토성을 이용하여 염초도회소를 보호/방어/지키는 토성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곳을 찾기 위해 여러 방향으로 수소문했더니 안타까운 마을 어른의 설명을 듣게 되었다.
수삼년전 수해 때 도랑이 넘치고 길이 끊어져 그 커다란 돌덩이 세개(고인돌)를 모두 포크레인을 이용해 3일동안 두둘겨 깨어서, 마을길 석축을 쌓는데 사용했다는 안타까운 증언이었다. 그렇게 역사적인 유물은 사라져 버렸다.
남아있는 고인돌이 있다고 해서 찾았더니 산모퉁이 지금의 용석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 좌측에 산소 옆 토종벌통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 작은 돌덩이들이 있었다. 이곳이 작은 고인돌이라고 한다.
<금마2리 용석리방향 도로변 야산에 있는 고인돌>
기고문에서 언급한,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다는 중샘(衆泉.샘물)은,
그 위치가 충북 제천과 영월군 경계지점인 좌측 논에 있었으나 이마져도 관정을 이용한 수량의 풍부함으로 인해 용도가 없어 메워진 상태이고, 대신에 아무도 찾지않는곳 작은 우물은 겨울철 영하의 기온에서도 샘물은 얼지않고 따스했다.
마을 어른의 말에 의하면 지난 50년대 60년대에는 피부병이 있으면 그곳 중샘에서 목욕을 하면 깨끗하게 치료되었다고 하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이가 시릴 정도로 매우 차가운 샘물이었다고 한다.
<골사기막에 있는 샘물>
염초자취 가마터라고 표현한 지형설명에서 왼쪽 골사기막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이 오른쪽으로 흐르고, 큰골계곡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은 왼쪽으로 흘러 마치 여체의 아랫도리 지점에서 합수되는 지점의 바로 위 즉 여체의 국부형상처럼 생긴 지형이 바로 가마터라고 했다.
그곳에는 옛 성황당이 있었으며 큰 참나무 고목 2그루가 있다고 했다.
정말로 그러했다.
풍수지리에는 전혀 지식이 없지만 언급한 부분을 찾은 금마리 사기막 마을의 지형은 그대로 였다.
단지 그 커다란 고목나무는 옆으로 쓰러져 흙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고 후대목인지 굵은 참나무 서너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쓰러져 다 썩은 모습을 보이는 나무는 지난 시절 마을길을 내면서 한쪽 뿌리가 잘려나가게 되었었고 고목 가운데가 텅 비어있던 터라 아이들이 나무속 빈 공간에 불을 해 놓았었고, 그 이후로 수명을 다하게 되어 자연적으로 쓰러진 것이라 한다.
이외에도 박충훈 선생은 마을의 구전을 근거로 세종실록을 연대별로 추적하여 금마리지역 염초도회소에 대한 실록의 기록들을 상세하게 열거하면서 마을의 여러 곳 원래의 명칭과 특산물, 토착민 성씨, 인구분포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금마리는 그 중샘의 효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연세 많으신 어른들 다수가 거주하여, 영월군에서는 장수마을로 지정되어 마을환경개선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다.
또한, 독립만세기념비에서의 3.1절 기념식도 지난해까지는 주천면 주관행사 였었으나 금년부터는 영월군 행사로 승격시켜 영월군내 모든 기관단체가 참석하는 행사로 진행을 한다고 한다.
<농촌건강 장수마을인 영월군 주천면 금마1리>
이처럼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의 역사가 숨겨져 있는, 잠자고 있는 금마리에 대한 학술적인 조사를 거쳐 전통테마마을로 재조명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과 청소년에게 살아있는 역사체험의 현장이자 교육 장소로의 활용에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판단이다.
그 바탕은 역사와 전통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지금의 금마리는 박충훈 선생께서 수많은 세월동안 여러 옛 문헌들을 찾아내고, 어려운 한문을 해독한 결과를 영월의 향토지인 내성의 맥에 기고를 한 것이다.
그의 바램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역사를 복원하고 재조명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후손들에게 산 교훈이 되게 하고, 다시는 지난 역사를 잊어버리지 말자는 큰 바램이 있었다고 본다.
<금마리 독립만세 기념비>
[*주]박충훈 선생 : 1945년 강원도 영월출생. 소설가.국제펜클럽 회원.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199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작가는 [소설] ‘그대에게 못다 한 말이 있다’ ‘세종과 김종서 군신’ '강물은 모두 바다로 흐르지 않는다', '동강' ‘못다 그린 그림 하나’ ‘남아 있는 사람들’ 등을 펴냈으며,
다년간 산행 체험을 바탕으로 2001년 산행에세이 ‘밥상위의 보약 산야초를 찾아서’, 2002년 술이 익는 에세이 ‘야생 생약재로 보약주 만들기’, 2003년 경험과 채험을 바탕으로 한 茶가 있는 에세이 ‘박충훈의 건강 茶 35선’을 출간하여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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