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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겨울나무

心 鄕 2005. 12. 25. 11:05

권영섭

영월 주천생

전 강원도교육청 근무

현 춘주문학회장

수필시대 신인상

 

수필시대 : 격월간 제5권 2005.11.1. 발행.등록(문화 마-02851)

           2005 11/12  p310~311

 

[수필시대 誌 신인상 당선작]

 

 

겨울나무

 

     - 권 영섭 -

 

나는 겨울나무가 좋다.

그 중에도 잎을 훌훌 벗어버리고 서 있는 나무들이 좋다.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산비탈에 잎들을 훌 훌 벗어버리고 恥部치부 까지 들어내듯 맨 몸으로 서 있는 겨울 나무를 누구나 한번쯤은 눈여겨 본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2년전 퇴직을 앞두고 휴가차 아내와 함께 주문진을 가늘고 한 겨울에 가파른 진고개를 넘은 적이 있었다.

눈이 하얗게 쌓인 진고개 비탈에 굴참나무 자작나무가 裸身나신으로 도열하듯 서 있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

그 외에도 거무튀튀한 많은 나무들이 들러리 서 있는 모습이 더욱 장관 이었다.

나는 즐비하게 늘어선 겨울나무를 보고 이내 엉뚱한 생각에 빠졌다.

나무들이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리듯 서 있다는 그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다.

 

어쩌면 어머니 가슴 같은 산봉우리에 입을 찰싹 붙이고 바둥 바둥 매달려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 가슴 같은 저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머니 같은 大地대지 가 담담히 품고 있는 것이다.

온갖 나무가 그곳을 터전으로 질서가 존재하고 생존을 영위하는 것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모든 나무들이 거꾸로 보이기 시작한다.

 

고향 뒷산에 해 묵은 소나무와 초등학교시설 여름날이면 모여 땅뺏기도 하고 공기놀이를 할때 서낭당 마당을 온통 그늘로 덮어주던 벚나무와 팽나무.

까만 고무신짝 들고 버들치 쫓아 헤매던 냇가에 머리를 감는 것 같이 늘어섰던 키 큰 마루나무까지도 거꾸로 다가오는 것이다.

신록으로 피어나던 푸른 잎과 자랑스럽게 뽐내던 꽃과 열매들 까지도 마치 타의에 의해 다 빼앗겨 버린 후 “목숨만 살려 주세요” 하고 도망치듯 찰싹 붙어있는 꼴이 가엾기까지 했다.

 

나 역시 지금 조직의 안주와 보호막을 잃고 도망치듯 어디론가 비굴하게 다가서 늦게나마 찰싹 붙을 산봉우리를 찾아가는 것은 아닌가.

저 나무들은 늘 산봉우리만 고집하고 있을까.

네가 고집하려는 것은 무엇이며 네가 지금 털어 버리고자 하는 것은 뭐란 말인가.

 

나는 사시 푸른 기상을 자랑하는 소나무도 한겨울에도 도톰한 잎을 자랑하는 사철나무보다도, 겨울이면 잎을 훌훌 털어 버리고 맨 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 편을 들어 본다.

한껏 피어낸 소중함도 버리는 나무들을 보며, 나도 땅에서 나는 씨앗을 먹고 땅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시며 살아가지 않는 가.

 

그렇다

나도 겨울나무처럼 지난날의 앙금을 털어보자.

사소한 일상에 매이지 말고 보다 고귀한 자연의 순리를 따라나서 보자.

걸림이 없이 삶을 주도하는 奇人기인까지야 아예 엄두도 내지는 않지만.

 

나의 일상에서 소중함을 찾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알량한 我執아집도 버리고 眞率진솔하게 다시 시작해야겠다.

다시 봄에는 시작하고 여름을 견디며 가을을 맞이하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처럼 나는 나의 새로운 생활을 위하여 낡은 방식은 고쳐나가는 시행착오를 거듭할 것이다.

 

잔설이 깔린 산등성에 깊숙이 뿌리를 묻은 겨울나무들이 자꾸 그립다.

나도 거꾸로 매달린 한 그루의 겨울나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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