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사랑해요.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미안해요, 사랑해요
할아버지가 이 세상을 뜨시던 시각, 난 쿨쿨 잠을 자고 있었지요. 드르렁~드르렁~코까지 골면서 말이에요.
이모할머니는 날더러 그럴 수 있냐고 야단쳤어요. 할아버지가 얼마나 널 사랑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도 쫑아 한 번만 보고 싶다고 하셨다는데…….
그런데요, 정말은 그 시간에 난 꿈을 꿨죠. 할아버지가 이전처럼 날 데리고 산으로 가시는 거예요. 너무 행복했죠. 아침이면 할아버지 방 앞에서 악을 쓰면서 산보를 가자고 떼를 썼었거든요.
아침 맑은 공기를 가르고 산으로 향할 때의 기분은 느껴보지 않은 이들은 정말 모를 거예요. 쫑아 몸은 날아갈 듯이 가벼웠고요. “쫑아야! 안녕!” 나무들이 건네주는 싱그러운 아침인사는 얼마나 날 기분 좋게 했는지 모릅니다.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죠. 그런데 머물고 싶은 순간은 왜 그리 빨리 지나갔죠.
얼마 전부터 할아버지가 편찮기 시작하셨습니다. 배가 많이 아프다고 하셨어요. 저런 맘마를 너무 많이 드셨나 봐요. 나처럼 많이 먹고 싶어도 꾹 참지 않으시고. 난 사실은 아프다는 게 뭔지 잘 몰라요. 할머니가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신문지로 만든 회초리로 매매를 하면 “아야!” 하고 잠간 참으면 되거든요. 가끔 미용실에서 내 몸에 상처를 내곤 했는데, 약을 발라주고 맛있는 간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참 많이 아프시데요. 며칠째 밤에 잠을 못 주무시고 의자에 않아서 밤을 새곤 하셔요. 걱정이 돼서 꽁꽁거리는 쫑아한테는 “괜찮다, 꼬야해라” 하시면서요.
아침이 되면 배가 아파서 허리를 구부리면서도 “쫑아야, 나가자!” 나가야지만 볼일도 보고 좋아한다고, 아픈 걸 참고 나가시는데 난 그저 좋아서 깡충깡충 뛰었죠.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어요. 저녁이면 언제나 할아버지가 들어오시기를 기다렸는데, 요즘은 안 들어오시면 어쩌나 걱정이 되는 거예요. 아니 영영 안 오시면 어쩌나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문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날 보고 할머니는 그만 들어가서 자라고 했지만 쫑아는 의리와 도리를 아는데, 어디 그럴 수가 있나요.
얼마 후에 할아버지가 너무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어요. 구급차에 실려 가시면서도 “우리 쫑아 누가 산보시키나. 빨리 나서 올게 기다려.”
“아니, 강아지 산보가 걱정이야. 자기 몸이 안 아파야지!”
당연히 할머니한테 핀잔을 당했죠, 그리고 할아버지는 다시 집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난 매일 현관 앞에서 기다렸는데요.
얼마 전부터 빈말처럼, 할머니에게 “내가 쫑아를 괜히 길렀나봐!” 하셨답니다. 끝까지 보살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 말씀에 쫑아도 가슴이 찧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프다는 건 너무 슬픈 일 같아요, 할아버지는 아주 중한 병에 걸리셨대요. 약으로도 주사로도 나을 수 없는 병. 할머니가 이모할머니한테 전화하면서 우시는 걸 들었죠. 얼마 전까지도 쫑아 데리고 산으로 산보 다니시고 테니스를 잘 치시던 할아버지인데. 난 믿어지지 않았어요, 쫑아도 욱욱 숨죽여 울었습니다.
산에 못 따라가서 운 게 아닙니다. 아침 식탁에서 할머니 몰래몰래 빵을 얻어먹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우린 정이 들었기 때문이죠. 할아버지가 쫑아에게 주셨던 사랑. 쫑아가 할아버지를 믿고 좋아하는 마음. 그 마음이 끝까지 지켜질 수 없는 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었죠. 병원에 계신 할아버지는 “쫑아 밥 잘 줘라. 산보를 못 시켜서 어떡하지” 온통 쫑아 걱정만 하시다네요.
할아버지 편찮으신 후에는 산보를 하고 싶어도 체념하고 한숨만 쉬고 있었어요. 그래도 매일 저녁이 되면, 오지 않는 할아버지가 다 나은 듯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현관으로 들어서시는 거예요. 난 너무 반가워서 할아버지 앞뒤로 돌면서 꼬리를 쳤죠. 그뿐인가요. 왜 지금 왔느냐고 그악그악! 소리도 질렀죠, 할아버지는 전처럼 “우리 쫑아 산에 가자.” 하시는 게 아닌가요, 우아! 난 신나서 앞장서서 달려 나갔죠. 그런데 할아버지는 하나도 안 아프신 것처럼 자꾸 빨리 가시는 거예요. 헉헉~ 내가 신나게 달려갔는데도 그만, 할아버지를 따라 갈수가 없었어요. 할아버지를 잃어버렸죠. 아무리 둘러보아도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그래서 울었지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하네요. 쫑아도 안 데리고. 전에는 혼자 나가시면 악을 쓰고 울었는데, 오늘은 혼자만 가셨대요. 우는 쫑아가 안 보이시나요. 그런데 그곳에 가면 아프지 않으실까요?
왜 내가 쫑아에게 그렇게 정을 들였는지 모르겠다며 한탄조로 말씀하셨다지요. 하시던 사업을 접으시고 눈앞에서 오물거리던 손자들도 훌쩍 다 커버리니 정말 적적하셨대요. 기관지가 나빠서 극구 반대하시는 할머니를 설득해서 나를 데려왔는데, 그때 쫑아를 만나서 큰 기쁨이 되었다고 몇 번이고 할머니에게 말씀하셨다지요.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운명적이었어요. 돌아가시기 전에도 쫑아를 끝까지 보살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하셨대요. 쫑아를 막내딸이라도 되는 듯이, 귀엽고 말 잘 듣는다고도 친구 분들에게 자랑도 많이 하셨다는데요. 그뿐인가요, 품격 있는 개라고 최상급의 표현도 서슴지 않으셨죠. 이 대목에서 쫑아는 우쭐거리지 않을 수가 없답니다.
미안해요, 할아버지. 매일 이른 아침이면 나가자고 꽁꽁거리면서 깨워서. 미안해요. 더 놀고 싶은데 “들어가자!” 하시면 요리조리 도망 다니면서 힘들게 해드려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간 마지막 나들이, 개보호소에 맡긴 우리 쫑아 스트레스 받는다며 구경도 다 못하시고 서둘러 나오셨다지요. 미안해요. 할아버지. 거실 의자에서 배를 움켜쥐고 잠 못 주무실 때도 그렇게 많이 아프신 줄도 모르고 쫑아 쿨쿨 잠만 자서. 쫑아 한 번 보고 싶다고 자꾸 말씀하셔서 할머니가 병원에 날 데리고 갔을 때 할아버지에게 나는 약 냄새가 싫어서 반갑게 달려가지 않았죠. 할아버지는 섭섭한 듯이 “쫑아가 날 잊어버렸나 보다.” 하셨지만, 아니예요. 반갑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린 쫑아에게 낯선 곳이 더 신기했기 때문이었나 봐요.
할아버지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할아버지가 날 사랑하셨던 것만큼. 할아버지의 사랑.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지난 2년은 쫑아에게도 가장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영원히 안 잊을 거예요. “할아버지 안녕!”
*쫑아는 돌아가신 큰 형부가 기르시던 퍼그(pug)종 개입니다.
형부 돌아가시고 얼마 동안은 길에서 할아버지 또래의 노인 분들을 보면 한없이 따라 갔지요. 지금도 형부를 제일 많이 닮은 둘째조카가 오면 품으로 달려들어 어쩔 줄을 몰라 한답니다. 가끔 한없는 그리움의 눈빛으로 먼 산을 쳐다보곤 하는 쫑아는 이제 5살이 됐고요. 할머니와 이모할머니인 나에게 즐거움을 듬뿍 주는 귀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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