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역사 유적

영월 의호총, 碑文 하나에 해석은 둘

心 鄕 2010. 12. 27. 15:51

 


역사, 문화유산으로 학술적 재정립 바라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88번 국가지원지방도로변 산자락에는 의호총이 있다.

 

이름 그대로 호랑이가 사람과 인연이 맺어진 의로운 호랑이 무덤인데 이를 증명하는 비석이 있었기에 오늘날 역사의 현장으로 주변을 단장하고 문화자원으로서 가치를 존중하여 영월 주천의 명소로 가꾸면서 지켜가고 있다.


사실상 호랑이와 사람사이에 얽힌 이야기는 각 지방마다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있으나 이를 보증하는 기록은 영월 주천의 의호총이 유일한 것으로 본다. 높이 96cm, 너비 35cm, 폭 11cm의 비문을 보면 앞면에는 義虎塚(의호총),
뒷면에는 癸亥七月日因巡營分付立(계해칠월일인순영분부입) 故今虎士師康熙(고금호사사강희) 庚子崩有虎終喪三日而死(경자붕유호종상삼일이사) 라 새겨져 있다.

 

 


이를 해석하면“1743년 계해 7월에 순영(조선조 정3품의 외관직으로 각도

관찰사를 보직하던 관원)의 분부에 의하여 세웠으며 , 금처사 사하가 1720년

(康子)에 국상을 당하여 호랑이와 같이 3년상을 마쳤는데, 그 호랑이가 3일

후에 죽었기 때문이다.“(조선 19대 숙종대왕 : 1661년 8월 15일 출생.

재위1674~1720. 승하: 1720년6월 8일 오전 8시 30분) 이다.

 

비문에 있는 그대로가 근본인데 해석을 달리한 책자가 있다.

 영월문화원 향토사연구회가 2008년 12월30일 발간한 영월인물지 31~32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사하(琴師夏) : 생몰연대는 확인할 수 없다. 본관은 봉화(奉花)이다. 금용성(琴用成)의 아들로 숙종 때 진사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겨울에 병이들어 생선을 드시고 싶어 해서 시내를 따라가며 울부짖으니 빙어(氷魚)가 뛰어 나왔다. 그 물고기를 어머니께 올리니 병세에 차도가 있었다.


1720년(경자년)에 국상(國喪)을 당하자, 아우인 금사주(琴師周)와 함께 주천(酒泉) 남산(南山)에 여막을 짓고 3년동안 여막에 살았는데,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니 세상에서 ‘금쌍효(琴雙孝)의 의호(義虎)’ 라고 일컬었다.


금사하가 죽은 뒤에 호랑이도 여막살이를 하던 옛터에서 죽으니 그곳에 묻어 주었다. 사림(士林)들이 표창하여 의호총비(義虎塚碑)를 세워 주었다. 급복(給復)의 문서가 있다. 지금은 남산을 금산(琴山)이라고 칭한다.

 

비문과 영월인물지 사이의 다른 점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시대는 이야기가 있는 길거리와 숲길, 둘레길, 올레길 등 다양한 이름의 걷는 길 만들기가 바람처럼 불고 있다. 역사를 찾고 구전을 찾아내고 그마저도 없으면 지형과 풍경에 어울리는 설화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영월은 있는 그대로를 해석하면서도 너무도 다른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니 몹시도 당혹스럽다.

 

진정한 영월의 문화유산이자 자원으로서 가치를 존중하고 높이면서 보존하고 지키려면 학술적으로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여 정립된 이론이 있어야만 한다. 전문가들의 논의를 거쳐 단 한가지의 역사이야기로 재정립하여 공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빌뉴스홈 > 인빌소식 > 강원 영월 술빛고을 | 기행/문학 | 출판일 : 2010.12.27 1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