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고향 e사람

함께 사는 정과 풍습을 이어가는 흥교마을/희망영월3월호/정애정 명예기자

心 鄕 2013. 3. 30. 21:42

<마을탐방>태화산 자락, 하늘과 맞닿은 첫 동네
                 함께 사는 정과 풍습을 이어가는 흥교마을

                                                                  정애정 명예기자

 

흥교마을은 영월읍 팔괴리~흥월리에서 경사가 심한 흥교재(흰깃재)를 넘어서면 광활하게 펼쳐진 양지바른 마을이다.

흥교라는 이름은 흥교분교 터에 신라시대의 대사찰인 ‘흥교사(興敎寺)’ 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영월군 남면 조전리, 단양군 영춘면 사지원리(속칭 하원마을)와 경계를 이루고 있어 옛날에는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화전농들이 마을을 이루어 한 때는 60여 가구가 살았다. 화전이 금지되면서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났고 지금은 11가구가 오순도순 마을을 꾸려가고 있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 의하면 흥교사는 유모의 도움으로 경주를 탈출한 어린 궁예가 이 지역 실력자인 기훤에게 기탁하기 전까지 승려로 생활한 사찰이다. 흥교사는 고려시대의 이름이며 궁예 당시에는 세달사(世達寺)라고 했다. 세달사, 혹은 흥교사는 흥교분교 터 일대에 있었다는 얘기만 전해질 뿐 정확한 위치를 모르다가 2004년 문화유적분포지도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 터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문화재청에서는 긴급 발굴조사를 실시해 사찰 관련 건물터 10여개 동을 비롯해 통일신라시대 이래 고려시대 기와 조각과 치미(망새), 청자조각 등의 유물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또 오는 봄에 계속해서 발굴조사를 이어갈 계획이다.


발굴조사 이전에는 학교 터를 비롯해 마을 곳곳에 기와 조각, 동자상 등이 널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흔했다.

한마디로 유물들이 발에 채일 정도였으며 아이들은 우리나라 전통 기왓장과 자기 등의 유물들을 밟고 다녔고 집집마다 담을 쌓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자연재해 없는 풍요로움이 넘치는 마을
해발 560m 선상의 넓은 고원에 위치한 흥교마을의 특징은 맑고 신선한 공기와 태풍 등의 자연재해가 없는 풍요로움이 넘치는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마을 사람들의 인심 역시 넉넉하다. 11가구가 전부지만 이곳에는 50~60년 마을을 지킨 원주민과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 온 사람, 살기 좋은 시골을 찾아 귀촌한 사람이 한데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 가며 살고 있다. 2년 전 흥교마을로 귀촌한 유봉열(75)씨는 “인천에서 살다가 6~7년을 경북 봉화, 강원도 정선 등 귀촌할 곳을 찾아 헤매다 흥교마을을 최종 터전으로 정했다”며 “다섯 식구가 함께 양지바른 좋은 자리에서 좋은 사람들과 살게 돼 아주 행복하다”고 말했다.

 

▲사진1. 문화재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흥교사 터.

▲사진2. 흥교마을 입구, 남면 조전리로 넘어가는 숲길. 누군가를 부르듯 한적하다. 

 

 

전국에서 알아주는 복숭아, 옛 풍습 지키며 살아요
흥교마을은 일교차가 큰 고지대로 수해와 우박 등 자연재해가 없고 서리도 늦게 내리는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그런 자연환경 때문인지 전국에서도 이름을 알아줄 만큼 당도가 높은 흥교 복숭아는 연간 5kg 기준 2만5000상자가 전국으로 팔려 나가고 있다. 다른 지역보다 조금 늦은 8월 중순부터 출하되기 시작하는 복숭아는 꽃이 피기 시작하는 5월쯤이 되면 파란 하늘과 분홍 꽃잎들이 피고 날려 마을은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9년 째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는 엄기영(69)씨는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에서 흥교 복숭아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며 “바쁠 때는 택배로만 하루 100상자 이상을 판매한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매년 정월에 치르는 당고사를 비롯해 마을의 오랜 식수였던 세달샘터 보존, 마을 세배 다니기 등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 풍습을 지키며 사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사진3. 올해 첫 농사를 준비하는 이웃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인 마을 사람들.


최근 엄기영씨 집에서 고추묘와 양파묘를 붓던 흥교마을의 올해 농업개시일.

첫 농사를 준비하는 이웃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가져 온 부침개와 식혜 등을 나누며 한바탕 웃음꽃으로 봄을 맞고 있었다. 

 마을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김형덕(75)씨는 “한 집이 두부라도 만드는 날이면 그 날은 모든 집이 저녁을 취소하고 함께 모여 두부를 나눠 먹으며 하루의 회포를 푼다”며 “기쁠 때나 어려울 때 함께 했던 조상들의 정과 풍습을 이어가는 것을 마을에서는 제일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