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동쪽은 충청도 영춘현(永春縣) 경계까지 58리, 남쪽은 충청도 영춘현 경계까지 24리, 서쪽은 충청도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49리이며, 원주(原州) 경계까지 53리, 북쪽은 평창군(平昌郡) 경계까지 44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내생군(奈生郡)이다. 신라가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쳤고, 고려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원주(原州)의 속현으로 하였다. 공민왕 21년에는 이 고을 사람인 환자(宦者) 연달마실리(延達麻實里)가 명(明) 나라에 있으면서 국가에 공(功)이 있다고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본조(本朝)에서는 그대로 하였다. 공정왕(恭靖王) 원년에 충청도에서 떼내어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내생(奈生)ㆍ내성(奈城).
【성씨】
본군(本郡) 엄(嚴)ㆍ신(辛)ㆍ연(延)ㆍ용(龍).
변(邊) 촌성(村姓). 진(秦) 풍기(豐基). 김(金) 영천(榮川). 윤(尹) 주천(酒泉). 송(宋) 내성(來姓)이다.
【형승】 칼 같은 산들이 얽히고 설키고 비단결 같은 냇물은 맑고 잔잔하다 정추(鄭樞)의 시에, “칼 같은 산들은 얽히고 설키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에 달이 비추고, 비단결 같은 냇물은 맑고 잔잔한데 풀과 나무에는 연기가 잠겼다. 주인이 학창의(鶴氅衣)를 헤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풍류(風流)가 그림으로 그려서 전할 만하다.” 하였다.
【산천】
발산(鉢山) 군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석선산(石船山) 군의 서쪽 35리에 있다.
대화산(大華山) 군의 남쪽 16리에 있다.
양산(梁山) 군의 북쪽 21리에 있다.
정양산(正陽山) 군의 동쪽 12리에 있다.
완택산(莞澤山) 군의 동쪽 19리에 있는데, 산꼭대기에 못이 있다.
가근동현(加斤洞峴) 군의 서쪽 14리에 있다.
고덕현(古德峴) 군의 북쪽 43리에 있다.
도현(刀峴)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금장강(錦障江) 군의 동쪽 1리에 있는데, 평창군(平昌郡) 연촌진(淵村津)의 하류이다.
후진(後津) 군의 서쪽 9리에 있는데, 강릉부(江陵府)의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온다.
음곡천(陰谷泉) 군의 북쪽 24리에 있는데, 근원이 음곡(陰谷)의 바위틈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후진에 들어간다.
밀적포(密積浦)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금봉연(金鳳淵) 군의 남쪽 4리에 있다. 금장강과 후진이 여기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다가 영춘현(永春縣)에 이르러 눌어탄(訥魚灘)이 된다.
【토산】 석철(石鐵) 군의 북쪽 가을현(加乙峴)에서 난다. 종유석[石鐘乳]ㆍ자단향(紫檀香)ㆍ백단향(白檀香)ㆍ회양목[黃楊]ㆍ오미자ㆍ지치[紫草]ㆍ송이ㆍ석이버섯ㆍ잣ㆍ인삼ㆍ지황(地黃)ㆍ복령(茯笭)ㆍ꿀ㆍ영양(羚羊)ㆍ산무애뱀[白花蛇]ㆍ누치[訥魚]ㆍ여항어(餘項魚)ㆍ쏘가리[錦鱗魚].
【누정】
관풍루(觀風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금강정(錦江亭) 금장강의 언덕 절벽 위에 있다. 선덕(宣德) 무신년에 군수 김부항(金復恒)이 세운 것이다. 동쪽으로는 금장강에 임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금봉연을 바라본다. 강 밖에 상덕촌(尙德村)이라는 마을이 있어 초가집들과 성긴 울타리들이 뽕나무들 사이로 숨었다 보였다 한다. 남쪽에는 밀적포가 있으니 나무들이 울창하고, 마을 연기와 물기운이 은은히 가리우고 어른거려서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 황희(黃喜)의 시에, “헌함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처마가 트여서 바람이 불어오기 쉽다. 늙은 나무는 그늘이 땅에 드리우고, 먼 봉우리는 푸르름이 공중을 덮었다.” 하였다.
매죽루(梅竹樓) 객관의 북쪽에 있다.
○ 군수 신숙근(申叔根)이 세운 것이다.
【학교】 향교(鄕校) 군의 동쪽 1리에 있다. 풍화루(風化樓)가 있다.
【역원】
연평역(延平驛) 군의 북쪽 35리에 있다.
양연역(楊淵驛) 군의 서쪽 16리에 있는데, 예전 양등소(楊等所)의 터에 있다.
제덕원(濟德院) 군의 북쪽 40리에 있다.
용정원(龍井院) 군의 서쪽 4리에 있다.
【불우】
창령사(蒼嶺寺) 석선산(石船山)에 있다.
흥교사(興敎寺) 대화산(大華山)의 서쪽에 있다. 고려의 중 충희(沖曦)의 비(碑)가 있다. 충희는 인종(仁宗)의 아들이다. 비의 글자가 벗겨지고 떨어졌기 때문에 한 구절도 읽을 수가 없다. 오직 비음(碑陰)에 스님의 문인(門人)을 기록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비음에는,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최선(崔詵)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글을 쓴다. 그 글에 옛날 태사공(太史公)이 이미 공자(孔子)를 위하여 세가(世家)를 짓고 또 70제자의 사적을 기술하여 열전(列傳)에 편찬한 뒤에 이름난 산에 감춰두었으며, 당(唐) 나라의 유자후(柳子厚)는 자기 아버지를 위한 신도비의 표문(表文)을 짓고 또 선인(先人)의 벗 66명을 기록하여 비석의 뒷면에 새겼으니, 비음에 기(記)를 쓰는 것은 지금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국사(國師)의 문인 2백 21명의 이름을 모두 왼편에 쓴다.” 하였다.
보현사(普賢寺) 양산(梁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군의 북쪽 3리에 있다.
여단(厲壇) 군의 북쪽에 있다.
『신증』
【총묘】 노산군묘(魯山君墓)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지금 임금 12년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지키는 사람을 두었다.
【고적】
육말연(陸末淵) 군의 동쪽 직곡 부곡(直谷部曲)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고을의 부호 엄비(嚴庇)가 그 곁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암말을 못 가에 두었더니 용이 나와서 교접하여 망아지 한 마리를 낳았다. 그 망아지는 걸음이 빨라서 무리에서 아주 뛰어났다.” 한다. 못은 뒤에 홍수 때문에 없어졌다.
오라사연(於羅寺淵) 군의 동쪽 거산리(巨山里)에 있다. 본조 세종(世宗) 13년에 큰 뱀이 있었는데, 어떤 때는 못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물가를 꿈틀거리며 기어다니기도 하였다. 하루는 물가의 돌무더기 위에 허물을 벗어 놓았는데, 길이가 수십 척(尺)이고, 비늘은 돈 같으며 두 귀가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비늘을 주어서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권극화(權克和)를 보내어 증험(證驗)하게 하였다. 권극화가 못 한가운데 배를 띄우니 폭풍이 갑자기 일어나서 끝내 그 자취를 알 수 없었다. 뒤에 뱀도 또한 다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직곡 부곡(直谷部曲)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매내향(買乃鄕) 군의 북쪽 25리에 있다.
마이탄향(亇伊呑鄕) 군의 서쪽 50리에 있다.
양등소(楊等所)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이목소(梨木所) 군의 동쪽 50리에 있다.
이달소(耳達所) 군의 서쪽 40리에 있다.
성며탄소(省旀呑所)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주문이소(注文伊所) 군의 동쪽 40리에 있다.
거탄소(居呑所)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정양산성(正陽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3백 14척, 높이가 19척이다.
완택산고성(莞澤山古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4백 77척이다. 3면이 석벽(石壁)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합단(合丹)이 침입하였을 때 고을 사람들이 여기에서 피난하였다.” 한다.
【명환】
본조 허주(許稠) 고을의 풍속에 부모를 위하여 다만 백 일 동안만 상복을 입었는데, 허주가 예(禮)로써 백성들을 타일러 3년상을 실행하도록 권하고, 초상과 제사에 소용되는 재료 등은 거의 도와주는 일이 많았다. 드디어 후한 풍속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김익정(金益精) 성품이 청렴하고 근엄하여 한 터럭만한 일도 백성을 요동시키지 않았다. 향교를 창설하여 백성의 마음을 진작시키고 학교를 일으키니 백성들이 다 감화하여, 지금까지도 강송(講誦)을 그치지 아니한다.
강진덕(姜進德) 정치함이 청렴하고 공정하였으며 송사나 죄수를 판결하는 일을 지체하는 일이 없었다. 지금까지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생각한다. 『신증』 최응현(崔應賢).
【인물】
고려 신염(辛廉) 공민왕(恭愍王) 때 한양 윤(漢陽尹)이 되었다.
엄수안(嚴守安) 군의 아전으로서 급제하였다. 사람됨이 담기(膽氣)가 있어 이르는 곳마다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며, 벼슬이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본조 신영손(辛永孫) 신염(辛廉)의 증손이다. 급제하여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아들 중거(仲琚)ㆍ계거(季琚)도 모두 급제하였다.
【효자】 고려 신영숙(辛永叔) 어머니의 상사를 당하여 3년을 마치도록 죽을 먹었다.
『신증』 【열녀】 본조 잉질지(芿叱之) 일수(日守) 임막산(林莫山)의 아내다. 남편이 죽으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도 또한 따라 죽을 것이니 광중(壙中)을 넓게 파도록 하세요.” 하더니, 남편을 장사하는 날 목욕하고 머리 빗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빈소의 곁에서 목매어 죽었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제영】 관가에 일이 없으니 아참(衙參)을 폐지하였네 이첨(李詹)의 시에, “성곽이 쓸쓸하고 돌길은 비꼈는데, 민가와 아전의 집이 반반씩 여남은 집 살고 있네. 물방아 찧는 소리 밤 도와 급한데 날이 장차 새려 하고, 벼랑 위의 벌꿀에 가을이 깊어지니 국화가 한창이라네. 풍속은 때때로 옛 늙은이에게 묻고, 관가에 일이 없으니 아침의 아참을 폐지하였네. 작은 고을을 누어서 다스리고, 그대는 박(薄)하다고 말하지 말라. 어린이들이 죽마 타고 와서 맞이함을 또한 자랑할 만하네.” 하였다. 산봉우리들이 비스듬히 물과 구름 속으로 뻗치니 송지(宋贄)의 시에, “산봉우리들이 비스듬히 물과 구름 속으로 뻗치니, 푸른 나귀를 거꾸로 타고 저녁 바람에 선다.” 하였다. 화락하여 옛 풍속이 있네 정구(鄭矩)의 시에, “하나하나 시속(時俗)을 물으니, 화락하여 옛 풍속이 있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숙종 25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방면】 부내면(府內面)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하동(下東) 처음은 20리, 끝은 60리이다. 상동(上東) 처음은 60리, 끝은 1백 20리이다. 천상(川上)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은 5리, 끝은 25리이다. 서면(西面) 처음은 10리, 끝은 45리이다. 북면(北面) 처음은 10리, 끝은 50리이다.
【창고】 동창(東倉) 40리에 있다. 서창(西倉) 25리에 있다. 사창(社倉)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진도】 서강진(西江津) 서쪽으로 8리에 있는데, 옛 이름은 후진(後津)이었다. 금강진(錦江津) 남쪽으로 1리에 있다.
【누정】 금강정(錦江亭) 강안(江岸) 절벽 위에 있다. 자규루(子規樓).
【능침】 장릉(莊陵) 북쪽으로 5리인 동을지(冬乙旨)에 있다. 본래 노산군(魯山君) 묘인데, 중종 12년에 승지(承旨)를 보내 치제(致祭)하고 수호하는 사람을 두었으며, 숙종 24년에 장릉이라 추봉(追封)하였다. 단종(端宗) 공의 대왕(恭懿大王)의 기일은 10월 24일이다.
○ 별검(別檢)ㆍ참봉(參奉) 한 사람씩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봉화 (역) ┃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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