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54쪽
능소화
7월, 봄꽃이 물러선 자리에 장미가 눈부신 자태를 뽐내더니 이른 장마에 젖어 꽃잎을 산산이 떨어뜨렸습니다. 아직 여름곷들은 제 모습을 자 드러내지 못했는데, 엷은 바람결에 넘늘거리는 푸른 줄기, 등불을 켜고 있는 듯 한 능소화가 피어납니다.
능소화(능소화), 업신여길 능, 하늘 소, 하늘을 능멸할 만큼 아름답다 하여 이름 지었는가요? 아니면, 하늘을 업신여기고 계속 기어 올라가 꽃을 피우는 나무라는 뜻인가요?
전설에 의하면 땅을 기어가는 가련한 꽃이었던 능소화가 소나무에게 “나도 먼 곳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부탁했답니다.
능소화의 아름다움에 반한 소나무가 쾌히 승낙하여 나무나 담을 붙잡고 자라게 되었다고 합니다.
“창밖을 한 번 보고 싶어요.”
요고시절 갑자기 온몸이 마비된 상태로 오랜 투병 주 내가 간절히 바랐던 소원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 한 쪽 팔을 잡고 힘겹게 서서 내다 본 창 밖 세상은 너무 눈부셨습니다.
내게는 정지되어 있던 시간에도 나무들은 여전히 푸른 기운을 떨치며 자랐고 하늘도 여전히 깊고 싱그러운 웃음 가득 머금고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담장에 능소화가 막 꽃을 피울 무렵이었습니다.
긴 투병시간을 뒤로 보내고 기적적으로 다시 섰습니다. 그러나 전과 다르게 약해진 발목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조기를 해주어야만했습니다. 자신을 가누지 못하는 꽃나무에 버팀목을 대주듯이 힘겹게 의지하고서라도 자람을 계속하며 푸른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보라는 눈물겨운 배려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서서 하늘을 바라다볼 수 있었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또 하난 나의 버팀목이셨던 어머니는, 부족한 딸을 두고 먼저 갈 수 없다고 꼭 같은 날 함께 하늘나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머니가 어느 날, 곁에 없으면 이내 쓰러져 몸을 가누지 못할 듯한 딸을 두고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난 홀로 남았습니다. 어머니 한 손 놓아버린 허전함에 바람 세차게 불면 휘청 옆으로 넘어지듯이 힘겨웠습니다. 모진 빗줄기에도 쓰러져 하늑거리듯이 주어진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녀리지만 강한 능소화의 초록 넝쿨손이 버팀목을 단단히 휘어 감듯이, 한 손 뻗어 포기와 절망 대신 용기와 희망을 잡아야했습니다.
영영 일어설 수 없을 만큼의 절망 속에서도 다시 설 수 있었던 건 하늘 향한 그리움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기억, 다다르고 싶은, 더 높은 곳을 향한 갈망이 진한 그리움 되어 나의 하늘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홀로 설 수 없는 한(한)도 가슴 속에 꽁꽁 매어주고, 푸른 넝쿨손 접지 않고 그렇게 높고 푸른 하늘로 기어올랐습니다. 해질 무렵이면 꽃빛 닮은 하늘가에 작은 꽃봉오리 올망졸망 걸어두고 스스로 행복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움은 나의 버팀목이었습니다. 그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견뎠고 그에 마음을 얹어 한세상 견뎠습니다. 그에 휘휘친친 마음을 감고 함초롬히 꽃을 피웠습니다. 마음 속 그리움은 타오를 듯 진한 핏빛이련만, 타고난 성품 탓인가? 다 드러낼 수 없는 속마음 한숨 숨죽인 주홍빛 꽃잎에 담아 넌지시 내비칩니다.
수없이 많은 여름이 왔고 능소화가 피어났습니다. 또 수없이 많은 여름날, 능소화가 주홍빛 꽃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다시 여름이 왔습니다. 담장 가에 능소화는 아직 피지 못했는데, 나의 무릎이 더 이상 다닐 수가 없다고 비명을 질러 댔습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잘 참고 견디기에 그처럼 견딜 수 없이 아팠는지를... 의사는 진통제 이외는 처방할 방법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약한 다리로 그만큼 버텼으면 이제는 좀 쉬게 해주어야하지 않겠느냐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달랠 방법을 찾지 못해 난감했죠.
무릎에, 약한 꽃대 받쳐주듯이 보조기를 대주어야만 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마지막 선택이었습니다. 삶의 진정한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휘청거리는 내게, 하늘은 생(생)의 푸른 넝쿨손을 거두지 말라고 간곡하게 일러주었습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하늘을 봅니다. 나의 강한 의지 담긴 버팀목이 있는 한, 나는 다시 설 수 있을 겁니다. 힘겹지만 푸른 넝쿨손 밀어 올려 이 여름에도 하늘 향한 그리움의 꽃을 피우겠노라고 거듭 다짐했습니다.
그리 살았습니다. 버팀목에 기대서도 하늘 향한 바람 접지 않고 꽃을 피우는 능소화처럼, 그리 살겠습니다. 능소화는 다섯 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한 데 붙어 있는 통꽃이므로 질 때도 활짝 핀 그대로 톡톡 떨어집니다. 낙화의 순간까지도 고운 빛깔과 형태를 간직한 채 내려앉음으로써 의연한 기품을 잃지 않습니다. 우아하고 정결한 모습으로 자태를 뽐내다가 추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는 목련과 비교가 됩니다. 마치, 죽어도 지조를 굽히지 않던 옛 여인의 정절을 보는 것 같아 퍽이나 대견스럽고 그래서 괜히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비바람에 찧어져 흩어지느니 차라리 목을 꺽는 비장함이랄까요. 떠나는 날까지 흐트러짐 없이, 구차하지 않게 살아가는 기품, 바로 그런 모습이 있어 그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이는가 싶습니다.
그대 향해 한 마음 가득 모아 그리워하다가 못내 그리워하다가, 어느 날 생의 끈을 놓아버리는 그 순간까지 그리워 하다가, 처음처럼,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 그대로 가렵니다. 어느 여름 날 하느작거리는 푸른 줄기 끝에 고운 자태로 피어난 능소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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