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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뛰기',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心 鄕 2009. 7. 10. 20:58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71쪽 '널뛰기'편

 

널뛰기

 

힘차게 발을 구른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몸에는, 어느새 날개가 돋는다. 붉은 치마폭을 바람결에 펄럭이며 새처럼 하늘로 오른다. 댕기머리가 함께 날리고 대롱대롱 옷섶에 매단 노리개가 흥겹게 장단을 맞춘다. 푸른 하늘가 구름 속으로 들어섰는가, 잠시의 황홀함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어느 정월에인가, 아버지가 뒤란에 두툼한 널판을 구해다 놓으셨다. 가마니나 짚단을 뭉쳐서 널밥을 만들고 그 위에 널판을 얹었다. 널판의 넓이와 길이는 다양하지만 널밥의 두께와 비례가 맞어야 한다. 널밥의 부피가 크면 널판도 넓고 길어야 한다. 세 딸을 위한 배려였겠지만 어린 내가 언니들과 맞서서 널을 뛸 수는 없었다. 중심부분에 자리 잡고 앉아서 양쪽에 번갈아 부러움의 눈길만 보냈다. 허리를 굽혀 발을 세게 구르면 대여섯 자씩이나 힘차게 솟아오르는 큰언니가 미울 정도로 너무 부러웠다.


그들이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는 사이 나는 큰언니의 맞은편 널판에 올라본다. 작은언니는 “좀 더 힘차게!” 하고 소리쳐주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발을 세게 굴러본다.
‘그렇지 나도 할 수 있어.’
갑자기 키가 한 자씩 쑥쑥 커지는 듯하다. 지켜보는 어머니보다 언니들보다 훨씬 커졌다. 그러나 똑바로 잘 앉으라는 타박을 받으면서 얼핏 정신을 차린다. 나는 가운데 똬리처럼 쭈그리고 앉아 언니들을 넘어서는 꿈을 꾸고 있었던 거다. 그들은 여전히 발을 구르며 더 높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조선시대 유가 윤리(儒家 倫理)는 여성들의 의식과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억제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려시대 여성들은 모든 면에서 남성들 못지않게 자유스러워서 말타기, 격구(擊毬) 같은 활달한 운동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널뛰기 역시 놀이의 성격으로 보아 당시의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옛 여인들도 날고 싶었으리라. 잠시 허공을 향해 꿈의 날개를 펴보고 싶었으리라. 벗어날 수 없는 하강의 삶에서 수직의 상승을 꿈꾼다.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벗들과 어울려 웃고 싶다. 발돋움하여 높다란 담장 너머 그 세상을 살피고 지나치는 이들의 모습도 보고 싶다. 뛰고 싶다. 울안이라야 이리저리 돌아도 겨우 몇 발자국, 살아있는 이의 혈기를 잡아만 두기에는 너무 좁다.

 

정초나 정월대보름 등 명절에, 양반집 뒤란도 좋고 수확이 끝난 논이나 밭도 좋다. 널뛰기는 아이들에서부터 중년까지 모든 연령층의 여성들이 서로 어울려가며 할 수 있는 놀이이지만, 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몸집이 비슷한 사람들이마주 뛰는 것이 좋다. 널뛰기는 보통 겨루기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널판위에서 뛰어 올랐다가 발을 세게 구르면 상대방도 역시 충격을 감소시키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가 높이 뛰어오르게 되고, 만약 균형을 잃어 절판 위에 내려서지 못하면 지게 된다.

 

전설에 따르면, 높은 담장 저편에 갇혀 있는 옥중의 남편을 보려는 아내가 있었단다. 다른 죄인의 아내를 꾀어 둘이서 널뛰기를 하면서 그리운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니 널뛰기를 이용해서 이렇게 지혜로운 일도 할 수 있구나 싶다. 

 

허누자 척실루 네 머리 흔-들 내 다리 삽작
허누자 척실루 네 댕기 팔-랑 내 치마 낭-넉
허누자 척실루 네 눈이 휘-휘 내발이 알-알
                             -널뛰기 민요


이렇게 저렇게 쌓인 고달픔도 가끔은 발이 알알해질 정도로 널판을 세게 굴러 뛰어오르면서 던져버린다. 단정한 매무새에 단단히 조이던 마음가짐도 펄럭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시할머니보다 시어머니보다 서방님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들 누가 무어라할 건가. 담장 너머를 휘휘 내다본들 또 그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온 힘을 다해 널판을 구르고 솟구치며 균형을 잡노라면 여인네들, 그동안 억눌렸던 몸과 마음이 활력을 찾게 되는 것이다. 날개를 박탈당한 시대, 우화(羽化)를 차단당했던 여인들에게 잠시 허용된 날갯짓이었던가 싶다.

 

널뛰기에 오르고 내리고를 통한 미묘한 쾌감이 있다. 그건 단순한 상승이 아니다. 균형과 힘찬 발돋움만이 더 높게 상승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 하강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할 때라야 다시 반등으로 솟아오르는 기회가 오는 것이다. 상승과 하강의 반복되는 두 동작이 균형이라는 힘의 배분에 의해 비로소 삶이라는 널판을 움직여 주는 기본이 된다는 깨우침을, 어린 시절 널판 중심에 앉아 어렴풋이 터득했다면 난 너무 조숙했는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힘차게 발을 굴러 보지도 못한 채, 언제인가 우리집 뒤란에 널판은 사라지고 그 뒤 아무도 널뛰기를 하지 앉았다. 언니들과 겨루어 더 높이 하늘을 향해 날고 싶었던 나는, 여고시절 갑작스런 사고로 몸이 불편해져 힘차게 널을 구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아무 말도 않으신 채 뒤란에서 널을 치워버리셨다.


상승 그리고 하강을 경험해보지도 못한 채 보내버린 아득한 기억 속 유년의 뜰에는 오늘도 여전히 널판이 놓여있고 힘찬 발돋움으로 솟아오르고 싶은 내가 서성이고 있다. 더 높이를 소리쳐주는 언니들, 대견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흐릿한 시야로 부드러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순간, 난 발을 구르며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결코 접을 수 없는 꿈의 날개를 달고서다. 푸른 하늘가 흰 구름 속으로 들어선다, 무섭게 걸쳐진 고달픈 오늘이 바람을 안고 가볍게 펄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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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뛰기에 오르고 내리고를 통한 미묘한 쾌감이 있다.

그건 단순한 상승이 아니다.

균형과 힘찬 발돋움만이 더 높게 상승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

하강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할 때라야 다시 반등으로 솟아오르는 기회가 오는 것이다.

상승과 하강의 반복되는 두 동작이 균형이라는 힘의 배분에 의해 비로소 삶이라는 널판을 움직여 주는 기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