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76쪽 '아름다운 틈새'편
아름다운 틈새
오가는 길가 보도블록 틈새에 이름 모를 조그마한 넝쿨이 자라고 있다. 바람 타고 씨앗이 날아 왔는지, 가녀린 줄기에 밥풀눈처럼 노오란 꽃이 서너 개 피어있는 양이 신기로워 한참을 들여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틈새란 언제나 좁다. 그러나 그 좁다란 틈새를 비집고 들어설 수 있는 것들은 의외로 많다. 보도블록 사이에 저처럼 흙 한 줌이 들어서고 그 흙은 또 씨앗 한 개를 품어 싹을 틔운 것이다.
참 좋은 친구가 있었다.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였지만 친구처럼 지냈다. 20대 좋은 나이에 사고로 척수마비가 되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친구. 그는 약한 손가락에 보조기구를 끼고 힘겹게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자신을 다스리면서 용기 있게 살아가는 모습이 대견했다. 내가 지닌 힘이 그리 크지 못했기에 늘 부족했지만 힘이 돼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무한한 사랑과 인내로 자신을 대해주기만 원했다. 나는 그렇게 넓은 가슴을 지니지 못했나 보다. 아니, 나 역시 내 주위에 사랑과 이해만은 원하면서 살아온 이 아니었나. 우리 사이에 서로 감정을 건드리는 말이 오갔다. 결국 처음에는 가볍게 금이 간 유리그릇이 조금씩 더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틈새가 벌어지고 아무것도 담아낼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서로를 향해 아끼던 마음들이 고이지 못하고 흘러내리게 됐다. 어찌 보면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도 힘차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 대비되는, 약하고 자신 없는 내 모습이 싫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틈새란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와 또 다른 하나가 만든 공간이기에 결국은 둘이 아닐까. 너와 내가 존재하지 않는 다면 너와 나 사이에 틈새란 없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한 그 틈새에 수많은 감정들이 머물 수가 없다. 틈새를 헤집고 스스로 나올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아무리 끄집어내려 해도 나올 수 없는 것도 있다. 아무리 메우려 해도 메울 수 없는 틈새도 있다. 그러니 틈새를 없애기 위해서는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개체와 개체가 하나 되지 못하면 틈새가 벌어지면서 영락없이 뭔가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는 어쩔 수 없이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없기에, 간혹 더 넓게 벌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좁혀질 때도 있겠지만 틈새가 없을 수는 없다.
미움과 원망이 만들어준 틈새에는 날카로운 가시넝쿨이 무성하게 자라 스치는 이들을 칙칙 휘감는다. 끊임없이 할퀴고 쥐어뜯으면서 상처를 입힌다. 가구와 가구사이에 틈새처럼 잡다한 변명들이 희뿌연 먼지처럼 수북이 쌓여가기도 한다. 또 한편, 오래된 목조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처럼 삐걱거리는 세월이 만들어준 틈새에는, 미움보다 더 큰 무심(無心)이 스산한 바람처럼 들어서기도 한다.
하지만 그 틈새를 메우기 위하여 무엇으로 채워 넣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가파른 바위 끝, 좁은 틈새 흙 한 줌에 솔씩 날아들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멋스럽게 자라 한 폭의 산수화 속으로 들어섰으니 얼마나 운치 있는가. 보도블록 틈 사이에 들풀이 무수한 발길을 피해가며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운가. 겹겹이 포개진 진초록 나뭇잎, 휘익~ 한 가닥 바람이 들추어 틈새를 만들었다. 그 틈새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은 땅바닥에 부딪혔다가 다시 튕겨 오른다. 아른아른 나비가 되어 난다. 내 안의 나를 찾아 성장시키는 노력의 결과다.
그 친구를 만난 지도 퍽 오래됐다. 간혹 다가서려 해보아도, 갈등과 세월 탓에 메울 수 없이 더 넓어진 틈새 저편으로 내 손이 닿지 않을 듯했다. 그러던 중 어느 인편에 친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위에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결혼했지만, 제 몸 추스르지도 못하는데 어찌 감당하겠느냐며 아기까지는 바라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그런데 아기를 가져 만삭이 됐다는 거다. 그나마 휠체어에 앉아 있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다고 했다. 반갑고 기쁜 마음 한편에 염려가 됐다. ‘얼마나 힘이 들까’ 측은한 마음에 가슴이 싸해지면서 전화라도 걸어 축하의 말과 함께 안부를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사 틈새를 많이 만들면 빈 바람이 들어서서 너무 허허롭다. 그 틈새를 메우지 못한다면 더욱 아프고 슬퍼진다. 그래서 그 틈새에, 나도 한 줌 따스한 온기로 채워 넣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꽃씨도 한 개 품어야겠다고. 미움의 꽃이 아닌 사랑의 꽃을, 무심보다는 유심(有心)의 바람으로 키워보리라고. 내가 그가 되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 믿음과 이해만이 그 틈새를 아름답게 메울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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