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81쪽 '꽃구경'편
꽃구경
긴 겨울의 끝에서 바라다보는 봄은 아득하기만 했다. 앙상하게 마른 가지를 드러내고 있는 나무들은 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듯했다. 바람은 심술 난 아이처럼 아파트 골짜기 사이를 윙윙 소리를 내면서 뛰어다녔고 자잘하게 내려앉은 햇살은 겨울을 떠나보내기에는 힘이 부치는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봄꽃을 만났다. 아! 일 년 만이다. 봄을 저만치 밀어붙이던 몇 번의 꽃샘추위에도 철을 아는 봄은 어김없이 다시 꽃을 피웠다. 아파트 입구 풀숲에서 민들레의 환한 웃음이 반가웠다. 제비꽃은 여전히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이름 모를 하얀 풀꽃이 소박한 웃음을 보낸다. 이어 울타리 너머엔 노란 개나리가 눈부셨고 진달래꽃이 피어나고 벚꽃이 피어났다. 모진 추위를 견디어내고 꽃을 피운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다시 다가온 봄을 가득 안은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문득 꽃구경을 하다 말고 눈시울이 젖어 온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봄꽃을 볼 수 있을까? 하시던, 생전의 어머니 말씀이 들려오는듯해서이다.
얼마 전에 친구와 여의도 윤중로 꽃길을 걸었다. 벚꽃이 피어있는 양이 흡사 뭉게뭉게 꽃구름을 두르고 있는 듯하다. 여느 해와 다름없이 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구부정한 어깨에 걸쳐진 빨간 점퍼, 아니면 분홍 점퍼는 꽃빛깔보다 더 고운 빛이건만, 얼굴 가득한 주름, 희끗한 머릿결, 나무 등걸 같은 손마디는 봄 햇살아래 더욱 선명하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면서 꽃구경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한낮의 거리에서 노인들이 꽃구경을 한다. 아니 꽃구경이라 하기에는 그저 다시 맞은 봄이 감개무량하여 그 봄을 놓치지 않으려 손에 꼭 잡고 다니는 것 같다. 흡사 꽃 향에 허기진 듯이 흠씬 들이마시면서.
매서운 겨울을 보내고 다시 봄날 속에 한 무리 되어, 봄을 향해 가는 그 길이 한없이 다행스럽고 신기로워 보였다.
“김영감이 내년에 꽃 함께 꽃구경 오자더니 지난겨울 저세상으로 먼저 갔구먼.”
한 노인의 한숨 섞인 말 한마디에, 동행한 노인들의 표정이 숙연해진다. 어쩌면 그분들이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봄을 맞는 노인들을 꽃들이 반가워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분다. 그도 꽃의 운명인가. 만개를 한 없이 지켜볼 수 없다는 듯이 매정한 바람이 분다. 낙화를 재촉하는 바람. 얄팍한 한 겹 꽃잎으로 견디기에는 세상 풍파 너무 모질다 싶다. 꽃들은 잠시, 만개의 기쁨을 누리지도 못한 채 바람결에 몸을 던진다. 시나브로 날리는 꽃비를 맞으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꽃길을 걷고 있다. 꽃잎은 초라한 어깨를 적시고 빗물처럼 흘러내려 거리에 흥건히 고인다.
歲歲年年花相似 年年歲歲人不同(세세년년화상사 년년세세인부동)
옛글에 ‘해마다 피는 꽃의 모양은 같건만 사람의 모양은 해가 바뀔수록 똑같지 않네’라 했던가.
봄은 눈부시고 찬란한데, 다시 피어난 꽃들도 고운 빛 여전한데, 주름진 얼굴엔 듬성듬성 검버섯이 꽃 대신 피어나고, 결코 가볍지 않은 세월이 굽은 어깨에 등짐처럼 얹혀 있다. 꽃길을 걷기에도 힘이 부치는지 몇 번씩 주저앉아 숨을 돌린다. 그동안 바람처럼 가는 세월 속에 눈여겨 봄꽃을 볼 시간도 없었다며 이제야 한가롭게 꽃길을 걷는다는 노인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피었는가 싶더니 벌서 꽃이 지내 그려…….”
오늘 한 떨기 매화는 지난해의 매화도, 내년에 필 꽃도 아니라 했다. 돌이킬 수 없는 하루하루를 은혜를 아는 마음으로 채워나갈 뿐이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을 되새겨본다. 꽃비를 맞으며 윤중로를 걷는 노인들의 굽은 어깨에도 오늘만큼의 행복이 봄 햇살처럼 걸쳐져 있다. 나 또한 오늘만큼의 행복을 안고 꽃구경을 한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 한철, 잠시의 꽃구경 아닌가. 피어남을 보고 스러짐을 보고 또 다음 해를 기약해 보고.
'스크랩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카이브별',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09.10 |
---|---|
친구 / 황여정 잣시 이안삼 작곡 (0) | 2009.08.29 |
7월의 고향 / 김선영 (0) | 2009.07.15 |
'아름다운 틈새',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07.11 |
'널뛰기',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