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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별',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心 鄕 2009. 9. 10. 13:43

'아카이브별',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중  94~98 ‘아카이브별’ 편


아카이브별

 

창밖에 한결 성글어진 나뭇잎 사이로 말간 하늘이 비쳐 보였다. 바람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나뭇잎은 더 크게 우수수 소리를 내면서 땅위로 내려앉았다. 그러면 하늘은 앞머리를 쓸어 올려 휑하니 서늘한 이마를 드러낸다. 오늘은 그렇게 가을이 떠나버린 텅빈 하늘에서 첫눈이 내리고 있다. 한 송이 두 송이 하얀 눈송이들이, 잿빛 구름 한 켠에 반쯤 얼굴을 내민 햇살을 안고 은빛 비행기처럼 반짝거리며 날아다닌다.

은빛 비행기가 날아가던 하늘을 보면 가슴 싸하게 생각나는 이름이 있었다. 언제나 한국을 떠날 때 공항에서 걸어주던 그의 전화는 한결같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이었다. “가을쯤 아니면 내년 초...”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런 저런 변명의 전화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인편에 급작스런 부음을 전했을 뿐이다. 난 그에게 그의 이야기 「아이다운 아이」가 실린 나의 수필집을 보내지 않았다. 귀국했을 때 직접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그와 나는 같은 반 짝 친구였다.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쯤 가는 곳에 사는 낭하,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는 곳에 사는 그 아이가 철길을 가로질러 신촌 역사를 지나 하교 길을 함께 다녔다.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가령 그 당시 10원이 버스요금이었다면 잃어버리기 선수인 내게 어머니는 늘 30원을 양쪽 주머니에 갈라 넣어주셨다. 그 여유 돈 10원을 가지고 그 아이는 나를 따라 버스를 타고 다녔다. 늘 걸어서 집으로 가던 아이에게 친구와 버스 타기는 새로운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하수도 맨홀을 즐비하게 만들어 놓은 곳을 지나게 됐다. 우리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툭툭 치면서 세어보기도 했고, 또 그 위를 껑충껑충 넘어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만 내 손에 쥐고 있던 10원짜리 동전을 떨어뜨렸다. 우리는 당황해서 오랫동안 이리저리 동전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손에 쥐고 있던 동전을 달라고 하지 못했다. 그 아이도 끝내 손에 쥔 돈을 나에게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만 버스를 타고 가지도 못한 그 아이와 나는 할 수 없이 그냥 걸어서 집에 오게 됐다. 말없이 걸어가는 나에게 그 아이는 그래도 미안했는지 가는 길 장터에서 소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었는지 그날 우린 소를 보지 못했다고 기억한다.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후 동창회 모임에서 다시 만났을 때 중년이 된 우리는 서로 잘 알아보지 못했다. 가슴에 붙인 이름표를 보고 “아, 아!” 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을 뿐. 그 후 내가 들추어 낸 오래 전 이야기에 그는, “넌 기억력이 참 탁월하구나” 하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꼭 그때의 동전을 갚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재미교포인 그는 그 후 고국을 찾을 때마다 초콜릿 선물을 가져왔다.
“그때의 동전만큼이야.”
관절이 약한 나를 위해서, 부탁한 약을 사다줄 때면 안쓰러움과 함께 굉장히 보람을 느끼는 듯도 했다.
“다음 올 때는 겨울이니까 눈이 내리겠구나.”
지금 한 송이 두 송이 무수히 많은 눈송이들이 너른 하늘 가득 휘날리는데, 그는 어느 곳에 있는지... 문득 언제인가 스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리의 별을 만드는 그 누군가는 그때 우주 어딘가에 또 다른 별을 하나 더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곳은 죽은 사람들이 가는 별. 그 별 이름은 아카이브라고 한데.
             -이치카와 다쿠치.「아카이브별 이야기」중에서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고, 얼마 전에 아내마저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그는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늘 아카이브별을 바라다본다고 했다. 사랑하는 이의 깊고 너른 가슴 속 어딘가에 눈물처럼 반짝이는 별.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 지상의 누군가가 사라진 누군가를 생각하고 추억해주는 한 그 사람은 아카이브별에서 살 수 있다고 한다. 기억이 삶의 힘인 별.

그곳엔 10살짜리 코흘리개 막내아들을 두고 떠난 그의 엄마가 있고,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하는 14살 아들을 두고 서둘러 아내 따라 떠난 야속한 아버지도 있다. 어린 아들, 딸과 함께 핏빛 정한을 남겨두고 떠난 그의 아내도 있으리라.

친구는 자신처럼 일직 엄마 잃은 아들, 딸을 홀로 키워 이제 모두 대학생이 되었다. 가끔 아빠 역할에 서툰 엄마역할까지 겸해야 하는 어려움을 농담처럼 툭툭 던지곤 했지만, 그 말끝엔 베인 상처를 건드리듯 아릿한 아픔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새 새둥지 떠나듯이 품 안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아빠에게 오히려 홀로서기를 충고하더란다.
“우린 언제까지나 아빠의 작은아이들이 아니에요.”

 

아카이브별, 먼 곳에서 바라다만 보기에는 사무치게 그리웠나보다. 다가가 손을 내밀면 찌르르 전해올 듯한 사랑하는 이들의 따스한 체온. 친구는 기어이 별을 향해 날아갔다. 언제나 공항에서 떠날 때처럼 마지막 인사도 남기지 않은 채, 다시 오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은 채로.

그는 지금 아카이브별에 살고 있을까? 내 가슴 속에 이렇게 남아 있으니 분명 아카이브별에 살고 있으리라. 그리움이 빛이 되는 곳, 아카이브별이 반짝이고 있다. 우리 언젠가 그 별에서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