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창

'아름다운 약속',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心 鄕 2009. 11. 1. 20:11

아름다운 약속

 

약속.1
얼마 전 K라는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다.
자신의 초등학교 동창 중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고, 또 수석으로 졸업하여 금년 초에 육군대장으로 1군사령관이 된 자랑스러운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 친구를 위해서, 지난달에 사회에서 얼마만큼 성공했고 또 비중 있는 자리를 지닌 친구들끼리 사령부가 있는 원주로 축하 방문을 하고 골프를 치기로 약속하였단다. 그런데 그때 마침 전방부대에서 사고가 나서 약속을 연기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날짜를 잡았는데 공교롭게 그날 자신이 아가는 교회에 피아노 반주를 하는 34살의 여전도사가 결혼하는 날이란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면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전도사와 결혼을 한다고 했다. 친구는 입버릇처럼 결혼식에 축가를 불러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단다. 친구들은 아내만 예식장에 보내고 원주에 함께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지만 결국 원주행을 포기하였다고 했다. 그날 축가를 불러주려고 목사님 부부를 포함 다섯 가족이 한 달 전부터 맹연습을 했기도 했지만 또 한 번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단다.

 

친구는 두 가지 약속을 세상의 저울로 가름하지 않았다. 자신이 값지다고 판단한 약속을 위해서 친구들과의 약속을 포기했다. 집 근처 작은 교회의 소박한 전도사 부부를 위해서, 그날 친구는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축복의 노래를 불렀으리라.

 

약속.2
K라는 친구를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우리는 타교에서 전학 온 남자친구의 소개로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꼭 한번 만났다. 우리는 다시 만나자고 손가락 걸고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득히 잊고 살았다. 그런데 몇 십 년 후, 그 친구와 고교 동창이고 나와는 초등학교 동창인 한 친구가 연결고리가 되어 중년의 나이로 다시 만났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들리는 것이 또한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기억하는 것이 정말로 더욱 깊은 교감이라고 했다. 우리는 소리 내어 약속하지 않았지만, 분명 약속을 했던 거다. 그 친구는 한 번 만난 소녀의 이름을 , 수많은 으름들이 존재하는 일상의 갈피에서 지우지 않았다. 보이는 얼굴 틈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모습을 잊지 않았던 거다. 아마도 꼭 다시 만나자는 무언의 약속을 지켰을 거라는...


오늘도 우리는 약속을 한다. 자신과 그리고 모든 주위사람들과. 약속은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이 더 많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는 일이 감람석(Peridot)처럼 빛나는지도 모른다. 약속을 한 순간부터 또 그 약속이 지켜진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들이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었으리라.

아름다운 약속은 서로에게 광채를 주는 별이다. 약속을 하는 그 순간부터 분명 우리를 지켜주는 빛으로 존재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