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뺑뺑이',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뺑뺑이
오래전 시골 장터에서였습니다. 웬 장사꾼이 좌판을 벌여놓았습니다. 뺑뺑이를 돌리고 행인들을 부릅니다. 기웃기웃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장수는 신나서 뺑뺑이를 돌립니다. 뱅글뱅글 재빠르게 돌아갑니다. 행인의 눈빛이 번득입니다. 막대를 힘차게 날립니다. 막대 끝에는 화려한 장식 깃털이 달려있고 한 쪽 끝에는 과녁으로 파고들 날카로운 화살촉이 박혔습니다. 화살촉은 숫자를 안고 어지럽게 돌아가는 뺑뺑이를 향하여 무섭게 돌진합니다. 멈추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맞았나요? 아니요. 또 꽝입니다. 몇 번째 시도입니까? 이제는 제법 요령을 터득했을 법도 한데...운이 좋아야 할까요? 요령이 좋아야할까요? 잘 찍어보려고 벼르고 별렀는데...
나도 처음으로 찍었습니다. 사립학교 입학추첨에서 돌아가는 뺑뺑이를 향해서. 요령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고 운이 좋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우리 학교,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고.
초등학교 시절, 짝하고 싶은 남자친구를 마음으로 점찍어 놓았습니다. 바라다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키가 맞지 않는다는 어이없는 조건 때문에 애석하게도 빗나갔습니다. 그때 난 조숙하게도 이른 체념을 배워야 했습니다. 더러는 빗나가기도 하는 게 세상 모든 이치인 것을.
그대의 마음을 향해서 내 눈빛을 찍었습니다.
“내가 찍었다고, 알았어!”
깊숙이 팬 그 자국은 분명 지워지지 않았는데 그대는 못 본채 떠나버렸습니다. 던지는 이와 받아들여지는 이 사이에 흐르는 바람이 멈추어버린 걸 헤아리지 못한 어리석었던 나는, 애달픈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우리네 삶, 그런 게 아닌가요. 뱅글뱅글 돌아가는 과녁에 적힌 부와 명예, 사랑과 권력을 향하여 현기증에 시달리면서도 번번이 낭패를 보면서도 이번만은 하면서 다시 힘을 주어 화살촉을 날립니다. 순간, 욕망이란 이름의 화살촉은 화려한 장식 깃털처럼 제법 빛깔 고운 꿈을 매단 채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고 날아갑니다.
더러는 행운의 숫자보다 불운을 안고 있는 숫자에 던져진 운명을 한탄도 했습니다. 손끝의 힘이 적절한 균형을 잃어 목표에 다다르지 못하고 허공에서 떨어져버린 적도 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빈칸, 번번이 헛손질에 맥이 빠져버려서 그대로 주저 않아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찍습니다. 젊은 시절 걸어가듯이 여유롭던 시간들이 중년을 넘기면 달려간다고 합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들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달려가는 세월과 비례하여 뺑뺑이 회전 속도 역시 빨라집니다. 뿐인가요. 기력은 전만 못하니 그만큼 기회를 잡기가 더 어려워지는군요. 또한 이런 저런 세상사 잡다한 생각이 눈앞에 자욱이 아른거리니 목표는 아득히 멀어집니다.
그러나 그동안 밖으로만 날린 화살, 어쩌면 이제는 내 안에 과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짜 과녁은 내 안에 내가 만드는 것이라고 어느 글에서 읽은 깨달음입니다. 그 과녁을 명료하게 보기 위해서 수북하게 쌓아올린 욕심을 밀어냅니다. 쓸어내지 못하고 어지럽게 펼쳐놓은 허례도 개켜 깨끗이 치워버립니다. 형광빛으로 채색되어 높은 곳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는 명예도 끌어내려 낮춰줄 때, 그제야 진정한 자아로 채워진 과녁이 눈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다시 뺑뺑이가 돌아갑니다. 다가서는가 싶으면 다시 아득히 멀어지고, 선명하게 보이는가 싶으면 흐릿해지는 과녁을 향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화살촉을 날립니다. 무한하지 않은 기회가 다가기 전에 서둘러야겠다는 생각도 퍼뜩 듭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실패를 깨끗이 날려 보낼 수 있는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해서 힘겨운 도전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좌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뺑뺑이 찍기가 주는 순간의 쾌감이 아니라, 그 행위가 주는 희망 때문입니다. 아직도 던져 찍을 수 있다는 마음만으로도 살아있다는 위로가 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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