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창

'왕년에',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心 鄕 2009. 10. 27. 09:38

'왕년에',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왕년에

 

“왕년(往年)에 말이야...”
으레 시작되는 B선생님의 왕년 타령에 이골이 난 동료들이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해 견디기가 어려운 듯하다. 한 친구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누구 왕년에 잘 나가지 않던 사람 있어!”
B선생은 겨울의 문턱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검은 외투를 걸치고 나타난다. 명동 어딘가에 꽤 이름 있는 집에서 만만치 않은 액수를 주고 맞춰 입은 옷이란다. 어깨에 들어갔던 두터운 뻥만큼이나 그를 자랑스럽고 따스하게 감싸주었던 옷이었다. 오늘은 동백기름 발라 빗어 내린 새색시 머릿결처럼 자르르 흐르던 윤기는 간곳이 없고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도 주인처럼 힘없이 흐느적거린다. 뒷덜미엔 털어내려 해도 연신 쌓이는 하얀 비듬처럼 빛바랜 세월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몇 가닥 실밥을 놓치지 않으려 간신히 잡고 있는 낡은 단추가 마지막 남은 자존심처럼 흔들거린다. 솔기마다 닳아버린 시간들이 풀죽은 얼굴을 슬며시 드러낸다.

 

가죽점퍼나 무스탕이 유행했던 시절에도 B선생은 그 외투만 입고 다녔다. 초겨울로 들어서는가. 햇살이 움츠러들고 우수수 마지막 몇 잎 남은 나뭇잎들도 바람에 날려 차가운 거리에 누워 뒤척인다. 그런 날이면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고 거리를 오가는 이들의 모습이 무척 멋있다고 해도 B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그 외투만 입고 나섰다.

“왕년에 내가 잘 나갈 때 말이야, 이 외투 당시로는 최고였어. 아무나 못 입었던 거지. 내가 이걸 입고 거리를 나서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였거든...”

으쓱, 습관적으로 외투의 깃을 올리고 앞섶을 여미는 그의 눈빛은 그리움과 자랑으로 뒤섞여 번쩍거린다. 하긴 그랬다. 당시에 수입 케시미어 코트는 아무나 걸칠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그는 참 똑똑했다. 일류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던 수재였다. 꼿꼿한 어깨에는 언젠 자심감이 훈장처럼 쩔그럭거렸다. 젊은 시절, 그가 생각하고 추진하는 일들은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한마디로 잘 나갔다. 그뿐인가 그는 놀 줄도 알았고 베푸 줄도 알았다. 그래서 그의 곁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러나 막힘없이 잘 나가던 그의 사업에 비상이 걸렸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부도를 막아보려고 애썼지만 힘이 들었다. 그동안 그의 곁에서 함께 즐거움을 나누었던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연하게 도움이 되어 주리라든 믿었던 이들이 등을 돌렸다. 재기를 꿈구기에는 너무 낮게 내려앉았는가. 몇 번의 힘겨운 발돋움은 더욱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세상인심이 봄인가 싶더니 하룻밤에 영하로 곤두박질치는 정이월 날씨 같다는 걸 그때서야 알게 된 B선생은 세상친구 대신 술과 손을 잡았다. 있는 자나 없는 자나 가리지 않고 근심도 잊게 해주고 더러는 신나고 즐겁게 해주는 술친구, 물론 ‘왕년에’라는 안주를 곁들이면 술맛은 더욱 고조되리라.

 

오랜만에 만난 B선생은 오늘도 술을 마셨다. 지나치면 으레 나오는 왕년 타령인지라 친구들이 아무리 말리려고 해도 어느새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그는 또 시작했다.

“아무개, 왕년에 내가 다 가르쳤지.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몰랐어. 놀 줄도 몰랐고 돈 쓸 줄도 몰랐어. 아무개는 또 어떻고, 그녀석 왕년에, 내가 잘 나갈 때, 우리 회사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지. 점심 먹이고 차비 주머니에 찔러 넣어줬지.”

고장난 테이프처럼 반복되는 이야기에 친구들이 고개를 돌린다. “왕년에 내가 명동에 떴다하면 지나가는 여자들이 다 쳐다봤지. 인물 봐줄 만하지, 옷차림 끝내줬지.”

어설픈 웃음 끝에 콧잔등에 걸쳐진 안경 너머에 안개서리 듯이 얼핏 눈물방울이 맺힌다.

B선생은 주머니에 차비를 넣어주며 등 떠미는 한 친구의 손을 뿌리치면서 호기를 부린다.
“너희도 알지. 왕년에 나, 벤츠 타고 다녔어...”
그리고는 이내 신주단지 모시듯이 한족에 벗어두었던 외투를 소중히 들어 올려 어깨에 걸치고 고래고래 소리친다.
“이놈의 날씨 삼한사온도 모르고 벌써 몇 날 며칠째 이 모양이야. 사람 동태 만들려고 작정했나!”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문을 나서는 그가 입은 삶의 외투는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러니 휘익 소리 내며 밀려들어오는 한겨울의 망설임 없는 저 거친 바람을 감사 줄, 내세워 자랑할만한 왕년이라도 없다면 오늘 그가 얼마나 더 추울까 싶은 생각이 든다.

뒤돌아보며 초라한 오늘을 견디는 B선생보다는 값진 오늘이 있기에 아프고 힘들었던 어제를 잊을 수 있는 나이고 싶다며,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에 한동안 안쓰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