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창

'바보 같은 약속',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心 鄕 2009. 10. 29. 13:43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바보 같은 약속

 

약속.1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이웃집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왔다. 이삿짐이 들어서는 걸 지켜보는 나를 한 여자아이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동네에 친구가 많지 않았던 나는 반가웠다. 우린 이내 눈웃음을 나누었고 이름을 물었다. 그렇게 눈이 서글서글하게 질 생겼던 그 아이와 나는 친구가 됐다.


나하고 동갑이었지만 한 학년 아래였던 그 애는 어린 동생이 많아서 외갓집에 와서 학교를 다니던 아이였다. 난 그 아이네 집에 가서 받아쓰기 숙제도 불러주었고 우리 집에 와서 그네도 탔다. 공기놀이, 모래장난 등 매일 같이 함께 놀았다. 다래끼가 잘 나는 나에게, 눈썹하나 뽑아서 차돌 밑에 깔아 큰 길에 놓아두라고 이방을 가르쳐 준 것도 그 애였다.


그렇게 단짝이 되어 매일 놀던 중에 동네 다른 친구를 알게 됐다. 그 아이는 우리보다 한두 살 아래였던 싶다. 그 새 친구는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서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놀았다.
어느 날 새 친구가 옆집 친구를 욕했다. 아주 나쁜 계집애니까 너도 같이 놀지 말라는 거다. 내 흉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았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쁜 애구나...’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인가, 크게 분해서 싸웠던가, 그런 기억은 없다. 그냥 좀 섭섭했고 나쁜 애라는데 같이 놀지 말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뒤 그 아이가 놀러 와도 같이 놀지 않았다. 새 친구와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 놀러왔다가, 내가 뭐라고 핑계를 댔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머쓱해서 돌아가던 그 아이의 뒷모습은 어렴풋이 생각난다. 하지만 얼마 후 옆집에서 두 아이가 노는 걸 보게 되었다. 기가 막혔다. 난 약속을 지켰는데...


그 후, 이웃집 아이와도 또 내 친구와도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나만 외톨이가 된 거다. 그러다가 그 아이들이 얼마 후 이사를 간 뒤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아이들이란 그런 거란다. 손가락 걸고 약속했지만, 또 그 약속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욕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한 손 내밀고 웃기도 하는. 바보 같은 약속을 지키려 했던 나만 바보였던 듯싶다.


약속.2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친한 상급생 언니가 내일 학교 뒷산에 가서 놀자는 약속을 했다. 아마도 그날이 공휴일이었던 것 같은데,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약속한 시간에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렸다. 버스가 한 대 지나가고, 또 한 대 지나가고, 상급생 언니는 내리지 않았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난 그저 기다렸다. 다리가 아픈 것도 참으면서 약속을 지키려고 서 있었다.
‘다음 차에 오겠지, 꼭 한 대만 더 기다리자.’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버렸다. 수많은 버스가 사람들을 내려놓고 또 사람들을 태우고 지나쳐갔다.
고집스러울 만치 바보스러운 나의 기다림을 허무하게 접은 것은 너무 배가 고파서일게다. 허기진 배를 안고 터벅터벅 혼자서 돌아오면서 고개를 저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그 언니는 하급생과의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아마도 약속은 잊은 채, 또 설마 내가 그렇게 미련스럽게 오래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난 그날을 기억한다. 그 언니 이름도, 바보 같았던 내 모습도.


한 세상 살아오면서 나는 내 주위사람들과 수많은 약속을 했다. 행복한 약속은 가슴 설레는 기대였다. 그 약속 때문에 눈부신 보석을 지닌 듯이 가슴 벅찼었다. 또한 지켜지지 않는 약속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으로 슬프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그 옛날처럼 약속을 지키려고 친구를 잃어버리는 따위의 어리석은 일은 하디 않을 만큼 영악해졌는지도 모른다. 지켜지지 않는 약속은 얼마만큼에서 접고 포기해야하는 법도 배웠다. 내가 건넨 약속도 지키지 못할 때는 적당하게 변명하는 요령도 터득했으리라.


‘그러데 오늘도 난 이곳에 서성이며 또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돌아오겠다고 약속 했지만, 약속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어떤 이를? 아니야 바로 나 자신이지. 상대편에 대한 순수한 믿음으로 작은 약속 하나도 가볍게 넘기지 않았던 어린 시절, 맑은 눈빛의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어도 난 문득문득 그 시절 나를 또 만나고 싶거든, 그 바보스러움이 주던 순수함이 싸늘한 세상사를 감싸주는 푸근한 윗옷처럼 그렇게 다시 걸치고 싶어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