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창

'섬진강 기차여행',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心 鄕 2009. 11. 3. 19:44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섬진강 기차여행

 

마지막 불꽃같은 아름다움을 태우던 가을이 아쉬운 모습으로 막 등을 보이고 돌아섰습니다. 이어 겨울이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내는 11월말에, 친지들과 전남 구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화엄사, 하동 최참판댁, 토지문학관 들을 들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곡성에서 관광용 증기기관 열차를 탔습니다. 승객이라야 우리 일행 여섯 명과 아이들 서너 명이 전부인데 그래도 기차는 떠난답니다. 약속이니까요.


열차는 1960년대까지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운행하던 형식으로, 일제치하 어려웠던 시절의 애환이 깃든 그 모습 그대로랍니다. 우리는 섬진강 강변 정취 따라 흐르고, 시골길의 풋풋한 내음 아련하게 젖어 들리라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렜습니다.


텅 빈 객실 안에는 한낮의 햇살이 산골 아낙네 모양 퍼질러 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들어서니 퍼뜩 정신을 차리며 활짝 건네주는 웃음에 한동안 눈이 부셨습니다. 그러나 이내 구면인 듯 우리 틈새로 끼어들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건넵니다.


기차가 떠납니다. 흡사 소풍 떠나는 아이들처럼 창 너머로 눈길을 던지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만히 쓸어내렸습니다. 얼마 만에 타보는 기차인가요. 아득히 먼 시간 속, 줄넘기 끈을 둥글게 묶어 그 안쪽으로 들어서서 ‘칙칙~폭폭~’ 소리를 내면서 한 방향으로 뛰어다니던 친구들의 천진한 웃음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소풍 길에, 수학여행 길에 타 본 기차도 기억 저편에서 칙칙~폭폭 여전히 힘차게 달려갑니다.


섬진강 푸른빛 물줄기 거느린 17번 국도는 전국에서 가장 달리고 싶은 길이랍니다. 그 길이 달음질치며 따라나섭니다. 윤슬*이 굽이굽이, 지나치는 바람 같은 나그네 마음에 휘감겨 흐릅니다. 파르라니 시린 물빛에 따스한 햇살 한줌 얹히니, 물결은 숨길 수 없는 떨림에 지긋이 눈감고 출렁거리는 가슴만 열어 보입니다.


섬진강은 아직 혼탁하지 않은 아이의 눈물처럼 마지막 남은 맑은 강입니다. 소백산맥과 전라북도 진안군의 마이산에서 발원하여 임실, 순창, 곡성을 지나면서 구례 벌판을 적시고 은빛 모래 위를 흘러 남해의 광양만까지 5백리 길을, 더러는 지극히 평화스럽게 때론 부서질 듯이 거센 몸짓으로 달려갑니다.


강물이 몸을 푸는 봄이면 매화꽃이 만발하고 산수유가 서둘러 봄소식을 전하겠지만 오늘은 강가에 억새풀만 빈 바람 안고 서걱거립니다. 꽃도 지고 주홍빛, 붉은 빛 고운 단풍도 떨어뜨린 맨몸의 나뭇가지들이 감추고 가려졌던 속내 모두 드러낸 벗처럼 오히려 살갑게 다가섭니다. 그 강가를 한 손 내밀면 닿을 듯이 기차가 지나갑니다.


산과 산들이 만들어낸 계곡을 휘돌아가며 풍아한 마을들을 거느리고 흐르는 섬진강. 그 강가 마을 오곡면 송정마을은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도산천(挑散川)가에 소나무 정자가 있어 경치가 빼어나므로, ‘솔정자’의 의미인 소정 또는 쇠정이라 부르다가 송정(松亭)이라 칭하게 되었답니다. 그곳은 효녀 심청이 태어난 곳이라 전해집니다.


창밖 풍경이 밀려들어오다가 멈칫거리고 외부로 향한 내 시선도 숨을 고릅니다. 물이 맑으며 깊고 산수가 수려하니 그처럼 효심이 깊어졌는가. 오염되고 탁한 도심의 공기 탓인지 오늘 효(孝)의 개념이 어제와 다른 듯싶습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저속에 머물러 있는 심청이 오늘 속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효(孝)를 할까 싶어 깊은 생각에 잠겨보았습니다.


섬진강은 고려말엽 우왕 때 왜구들이 하동 쪽에서 강을 건너려고 할 때, 진상면 섬거에 살던 수만 마리의 두꺼비들이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 나루터로 몰려 와 진을 치고 울부짖어 왜구들이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써 섬진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차창 밖 와글거리는 두꺼비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분명 다가서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말없이 아픈 역사 진득하게 밴 어제를 품고 오늘을 안고 그리고 내일로 흐르는 섬진강 물소리입니다. 매해 피었다 지는 매화꽃 향기 강물에 담고 절절히 흐르는 섬진강의 속 깊은 숨소리입니다. 가슴을 세차게 흔드는 요동(搖動)이 아니라 촉촉이 적시며 쉼 없이 흐르는 물줄기에 혼곤히 취해 나 도한 흘러봅니다.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지
섬진강 가에 서서 당신도
매화꽃잎처럼
물 깊이 울어보았는지요.

 

지긋이 눈감고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시구를 읊조리고 있노라니, 시의 향기에 취한 탓인가. 눈앞에 한매(寒梅)가 흰 눈 내린 듯이 피어납니다. 숨 막힐 듯 그윽한 매향 내 곁을 맴돕니다. 어느 날 꽃향기처럼 다가와 그리움 되어 남은 이름 하나도 애틋하게 가슴 속에 흐릅니다. 그때, 기차가 한 번 길게 깊은 숨을 토해내듯이 기적을 울렸습니다. 어느새 도착지 가정역입니다.


잠시 멈춤, 종착역이 아닌 다시 돌아가기 위해 탄 기차입니다. 출발지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인생의 종착역처럼 회한과 쓸쓸함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승객으로 북적대지 않는 가정역은 인색한 겨울 햇살 한 자락 두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차는 객을 슬그머니 부려놓고선 잰걸음으로 달려오던 숨을 고릅니다. 휘익~ 싸늘한 바람 맴도는 가정역 그 언저리를 서성거리다가 문득, 지금 내가 타고 가는 인생 기차는 어느 굽이를 돌아가고 있는지? 다음 정거장은 어디인지 궁금해졌습니다. 한 번도 달려가 본 적이 없는 낮선 길을, 편도기차표만을 손에 쥔 채 달리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졌습니다. 후회 없이 머물렀던 순간에 흠뻑 취할 수 있도록, 작은 순간에도 소중한 의미를 두어야겠다는 깨달음이 사느랗게 살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강물이 다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듯이 우리네 인생길도 돌이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삭하게 메말라버린 나의 일상에 섬진강 물줄기 흥건히 흐르게 해준 오늘 기차여행은, 지나쳐 온 그 아름다운 길을 다시 돌아갈 수 있음에 더욱 축복이라 여겨집니다.
“치익~폭....”


다시 한 번 깊고 크게 뱉어내는 기적소리에 산득 정신을 차려봅니다. 그 소리맴은 살아오면서 내가 지키지 못한 수많은 약속에 대한 깨우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인생열차, 아직은 갈 길이 남아 있기에 힘차게 달려야한다는 거듭된 채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윤슬 :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