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핀 유도화,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사막에 핀 유도화
사막을 달린다. 채 어둠이 걷히지도 못한 이른 아침부터 달린다. 차창 너머로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 지평선이 펼쳐진다. 진한 어둠을 헤치고 붉은 기운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불꽃보다 더 붉은 아침 핵 솟아오른다. 웅장하다. 하늘은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화가의 붓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종횡무진 거침이 없다.
내가 살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 하늘을 연지 빛으로 물들이면서 조심스럽게 떠오르던 태양이 아니다. 광활한 사막의 아침은 그렇게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그리고 거리낌도 막힘도 없이 열리고 있었다.
어느새 태양빛은 우리와 함께 달렸다. 자신의 모습을 여지없이 대담하게 드러낸다. 눈부시다. 자심감이 넘친다. 그러다가 반쯤 구름 속으로 몸을 감추기도 한다. 인생사 그런 거 아닌가. 드러냄과 감춰짐, 기억과 망각의 반복되는 형태 속에 어렴풋하게 자신의 그림자를 쫒아가는 것이, 나 또한 구름 속으로 스며든 햇살 따라 반쯤 눈을 감고 저 멀리 두고 온 것들을 잠시 떠올렸다.
아, 바다다! 착시인가. 하루에 7~8시간씩 차를 타고 달리는 빠듯한 여행일정, 피곤 탓에 깜빡깜빡 꿈길을 헤매고 또 가끔은 눈을 뜨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두니, 분명 저 멀리 바다가 물고기 등처럼 은빛 비늘을 반짝이면서 넘실거린다. 사막 속의 바다? 몇 번 고개를 젓는다. 아니, 신기루다. 구름바다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물기를 뿌리에 축척하고 죽은 듯이 잠자고 있는 갈색의 풀밭. 그 마른 풀밭이 흠뻑 빗줄기에 온몸을 적시고 언제라도 초록 빛깔로 깨어남을 간절히 갈망하듯이, 메마른 땅 사막도 물결 넘실대는 바다를 그리워했던 듯싶다. 결코 다가설 수 없는 먼 바다를 그리고, 은빛 모래구름은 백사장을 만들어 보여준다. 드넓은 바닷가에 잔잔한 물결이 우리를 따라 길게 흐른다.
친구들과 미 서부여행,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출발하여 미국 제2의 국립공원 요세비티를 들러 캘리포니아 최대의 농업도시 프레즈노 향하는 길이다. 메마른 사막에 4,418미터나 되는 거리의 레이타 호수에서 수로로 물을 공급한다. 스프링클러로 물을 분수처럼 뿜어 올려 농장을 만들었다. 주어진 여건을 뛰어 넘어서는 인간의 의지가 놀랍다. 드넓은 사막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며 또 얼마나 강인한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랜지밭, 포도밭이 시작되고 또 끝없이 이어지는데 유도화고 끝없이 피어있다.
유도화, 꽃잎은 불그스레하게 달아오른 소녀의 뺨처럼 곱고 버들잎 같은 두텁고 좁은 잎과 대나무를 연상하게 만드는 가느다란 줄기는 보호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가냘픈 여인 같다. 향기에 취하고 색에 취하니 누군들 유혹당하지 않겠는가. 그런 차마 물러서지 못하고 멈칫거리다가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강한 독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찌 하겠는가. 꽃, 잎, 줄기에 맹독을 지녔다고 하므로 잎을 물고 다니는 습관조차도 매우 위험하다고 한다. 외국의 문헌에 의하면 유도화 줄기로 꽂은 고기를 먹고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한 장의 잎만으로도 중독이 될 수 있으며, 마른 잎도 독성이 남아 있다.
빛깔이 곱다. 자태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 이 있었다. 그러나 뒤늦게 그 아름다움 뒤에 서린 독기를 찾아내고 후회하며 가슴을 친다. 그 꽃의 즙을 짜서 사랑했던 정인에게 사약으로 내린 역사 속 비사가 있다. 조선 19대 왕 숙종과 장희빈의 이야기라고 전해 들었다.
우리 집 옛 들에도 유도화가 한 그루 있었다. 아름다운 꽃빛깔 탓에 강한 독기를 알지 못했다. 가끔 꽃을 꺾어 머리에도 꽂았던 기억이 나니, 알지 못했던 아이에게는 사자 굴도 두렵지 않고 맹독성의 물질도 거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겹. 두려움이란, 결국 상대를 알기 때문에 얻어지는 병이 아닌가 싶다. 어느 날 미처 월동준비를 해주지 못한 탓에 바삭하게 발라죽어 버린 유도화에 대한 추억은 아득하다.
장희빈, 독기를 지녔으나 치명적인 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지는 못했듯이, 독을 지녔으나 스스로 한기를 물리치지는 못했나 보다. 사막에 저처럼 즐비하게 피어 있는 유도화는 꽃이 지닌 독성 때문에 농작물에 해충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는 원리를 이용하는 거라 했다.
꽃은 아름다워야 한다. 꽃은 향기로워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 곁에 두고 바라다보고 향기를 취한다. 유도화, 슬픈 꽃이다 붉은 빛Rf이 곱고 자태도 아름답다. 화려한 용모에 어찌 고개를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가섬을 거부하기 위해서 피어 있어야하는 꽃이 아닌가. 어찌 보면 꽃이 지닌 성품으로는 너무 잔인하지 않은 가 싶다. 유도화, 붉은 꽃이 토해내는 독기 서린 한스러움에 나도 잠시 아득, 정신을 잃어본다.
우리가 탄 차는 다시 끝도 없는 사막을 달리고 있었다.
'마음에 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빛 추억,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11.16 |
---|---|
미인도,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11.15 |
유향재(有鄕齋),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11.04 |
'섬진강 기차여행',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11.03 |
'아름다운 약속',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