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창

달빛 추억,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心 鄕 2009. 11. 16. 19:00

달빛 추억,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달빛 추억

 

친구와 먼 길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숨죽인 태양빛도 서편 하늘 저 너머로 멀어지고 어느새 어둠이 습기처럼 스멀스멀 하늘가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차창 밖을 내다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 달님!”
신기하게도 아파트 골짜기 저 너머로 보름달이 떠올랐습니다. 예전, 집 뒷동산 그 너머로 슬며시 자태를  드러내던 은밀한 만남이 아닙니다. 소나무가지 끝에 운치 있게 얹혀져 있던 그 달빛도 아닙니다. 고층아파트 끝에 아주 가깝게 다가와 걸려 있는 자태가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 옛날 내가 품었던, 그러나 아득히 잊고 있던 정인처럼, 달은 여전히 그윽한 미소를 흘리면서 우리들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깊은 밤이었습니다. 뭔가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꿈을 꾸고 있는 듯했습니다. 어렴풋한 꿈속에서 누군가 나를 깨우는 듯 스치는 손길이 있어 그만 잠이 깼습니다. 나는 이리 저리 뒤척거리면서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가버린 꿈을 좇기에는 너무 멀어졌는지, 몇 번 손만 허우적거리다가 누구에게인가 이끌리듯이 뜰로 내려섰습니다.


아! 비가 막 그친, 애달피 울다가 멈춘 어느 여인의 눈시울처럼 젖어 있는 하늘가, 아직 검은 습기 가득 머금은 구름 사이에서 달빛이 분수처럼 눈부시게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은백의 달빛이 뜰 가득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람 한 줄기 스치니 그윽한 달빛 향기 휘익 다가옵니다. 그 진한 향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나를 깨워준 손길이 달빛이었음을...


뜰 한쪽 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통나무로 얼기설기 엮어준 버팀목 위로 수세미 넝쿨들의 가냘픈 손들이 달빛이라도 잡으려는 듯이 너울거렸습니다. 무성하게 자라나는 그 너른 잎사귀들 위에 달빛이 멈춰 있었습니다. 아니, 그 물기 머금은 잎사귀들이 한껏 달빛을 빨아드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듯한 정적, 너울거리는 잎사귀들 사이에서 달빛만이 홀로 존재하는 밤이었습니다. 손짓하는 잎사귀들에 거부 없이 다가서는 달빛의 부드러운 몸짓이 신비로웠습니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황홀함, 어둠에 머물렀던 존재들이 투명한 달빛을 걸치고 서서히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그건 어둠과의 대비 속에 더욱 뚜렷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선명함이 아닙니다. 은밀하게 가려짐 속에 더욱 깊숙한 곳을 드러내는 속 깊은 몸짓이었습니다.


뒤란엔 달이 많았습니다. 우물 속에도 두레박 따라 내려서 깊숙이 잠겨있고, 이곳저곳 흙이 움푹 패어 고인 빗물도 자신의 몫인 달빛 한 개씩 품고 있었습니다. 장독대에 놓인, 빗물 고인 자배기에도 달빛은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나 또한 흥건하게 고인 외로움에 내 몫의 달빛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달빛과 하나 되어 검푸른 잎들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인지...칠월 보름, 그날의 달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신비로웠던 나의 뜰. 달빛 한 자락 휘어 감고 홀로 서 있던, 젊은 날의 아름다웠던 나의 모습도.


오늘, 아파트 좁다란 골짜기를 헤치고 나를 따르는 휘영청 밝은 저 달빛이, 그 옛날 나를 깨우던 그 달빛이 아닌가 하여 두 팔을 벌려 가득 안아봅니다. 그러나 잡으려 해도 어느 결에 달려가는 바람처럼, 달빛 역시 어느새 빠져나가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집니다. 칠흑 같았던 귀밑머리에 희끗 스며들어 은빛 빗자국만 선연하게 남겨놓고서 말입니다.


멈추지 않는 열정을 솟구치게 하는, 가슴 속에 샘물 하나 품지 못하면 진정 달빛을 내 것으로 영원히 간직할 수 없습니다. 정 깊은 이처럼 가슴 깊숙한 곳에, 우묵한 웅덩이 하나 만들지 못하면 달빛을 영영 잡아 둘 수 없을 겁니다.


달빛은 여전한데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 나도 세월 따라 흐르며 어느새 가파른 언덕을 넘어서 서서히 아랫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나이, 이곳에 왔습니다. 이제야 다시 달빛 머물, 가슴 깊숙한 곳에 문학이라는 이름의 샘물 하나 품었습니다. 그 샘물에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달빛 잡아두려, 그리 먼 길을 숨차게 돌아왔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