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창

미인도,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心 鄕 2009. 11. 15. 21:12

미인도,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미인도

 

동백기름 발라 단정하게 땋아 내린 삼단 같은 검은 머리, 가는 명주실로 잔털을 밀어낸 반듯한 이마에 가지런히 정돈된 반달처럼 휘어진 눈썹, 얇고 고운 눈매. 맑고 깊은 눈동자는 투명한 이슬 한 방울 걸쳐져 있는 듯 금세 떼구루루 굴러 복숭아처럼 솜털 보스스한 고운 뺨 위로 흘러내릴 것만 같다. 부드럽게 내려오는 허리를 받쳐주는 마늘 끝처럼 도톰하고 복스러운 코, 흡사 앵두를 물었는가.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는 입술은 꽃봉오리처럼 봉긋 거리면서 향기를 내뿜고 있는 듯하다.


벽 한쪽에 걸려 있는 그림 속 여인은 복사꽃 그늘아래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머금고 있다. 보일 듯 말 듯 비치는 하얀 이는 상아빛 구슬 같다. 보얀 목덜미 끝에 세운 저고리깃, 흰 동전이 정갈하다. 살포시 감싸 안은 다홍빛 치맛자락 끝으로 갸웃이 비치는 속옷이 눈부시다. 단아하고 조용하다. 그녀는 살포시 눈을 내리깔고 그림 속에서 사뿐히 걸어 나왔다.


가려진 장옷 사이 틈새로 내다보이는 좁은 세상 속으로 조심스레 발길을 내딛는다. 건혜, 하얀 버선, 조용한 걸음새는 나지막한 돌담을 스치고 연꽃무늬 돌난간을 지나친다. 간혹 지나는 바람이 장난스럽게 옷깃을 들춰보지만 단호한 몸짓에 멀쑥한 표정으로 물러선다. 얼마큼쯤 지나쳤는가,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위해 어느새 장옷을 벗어버린 여인은 놀랍게도 치마폭을 감싸 올린다. 아! 순백의 무처럼 매끈한 다리, 거침없는 발걸음은 자신감이 역력하다.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큼직한 눈은 빛을 발하고 산맥처럼 높직한 콧날에서 녹록치 않은 패기가 번뜩인다, 드러낸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이어 대담하게.


그녀를 만났다. 갸름한 얼굴에 두껍게 쌍꺼풀 진 접시처럼 큰 눈, 외국 배우처럼 우뚝 선 코, 어느 모서리에 부딪혔는가, 두품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은 펄이 들어간 립글로스 탓에 더욱 도발적이다. 할 말도 많다. 시대 흐름을 따라 변화된 미인이 되기 위해서 어제의 자신을 버렸단다. 그리고 서슴없이 이야기 한다.
“미인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똑같다. 조금 전 지나온 길모퉁이에서 만난 어느 여인과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다르다는 건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상징일 수도 있고 고유성을 지킬 수 있는 정체성도 될 수 있다. 그 다름을 자기만의 개성으로 살려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요즘 성형외과에 한 장의 배우 사진을 들고 와서 혹은 요즘 유행하는 성향의 미인을 거론하면서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조른다. 그리고 그들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을 느낀다.


아름다워지고 싶다. 수많은 여인들이 아득히 먼 과거 속으로부터 화살 같이 빠르다는 오늘을 향해 활기찬 걸음을 달려 나왔다. 서구화된 삶의 방식 탓에 여인들은 서구적인 미인들을 닮고 싶어 한다. 작은 꽃의 수줍은 듯 한 엷은 미소보다는 자신에 찬 큰 웃음소리가 더욱 시원스럽고 멋스럽다고 한다. 울긋불긋 화려하고 강한 색채, 눈부시다. 시선을 끈다. 그래서 유행을 따라 자신만의 빛깔도 형태도 미련 없이 버린다. 내면을 성숙시키지 못한 채 겉모습만을 변화시키는 무모한 일을 서슴지 않는다. 오늘의 세상이 원하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내세운 채.


바람 드센 거친 들판에 피어난 이름 모를 야생초에게는 그 꽃만이 지닌 빛깔이 있다. 더러는 가느다란 줄기에 볼 품 없는 작은 꽃을 피우지만 강인한 생명력과 진한 향기가 놀라워 눈길을 준다. 뒤뜰이나 토담 가에 피어난, 백일홍이나 분꽃, 채송화 등 1년초에게는 꽃을 피우고 씨를 맺고 한 해를 열심히 살아가야하는 사명이 얹혀 있다. 세련되고 화려하지는 못하지만 소박하고 푸근한 모양새에 정겨움이 있다. 꽃들은 결코 다른 꽃들의 향기와 화려한 빛깔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우아한 자태를 닮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작은 꽃들은 큰 꽃들의 당당한 웃음 앞에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자기 몫의 빛깔과 향기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서 스스로 행복해 한다.


그런 꽃들의 작은 마음이 좋다. 자신만의 속 깊은 향기가 아름답다. 그 꽃들 앞에서 나는, 더 화려하지 못하고 더 빛나지 못하다며 부끄러워했고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고개 숙였던 마음을 접는다, 그리고 나만의 빛깔과 향기로 채색된 미인도를 가슴속에 조용히 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