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유향재(有鄕齋)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는 시인 서정주 님이 태어나서 10년을 산 곳이다. 흥덕에서 22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잠시 가다가 김성수 선생 생가 표지판을 보며 734번 도로를 따라 들어간다. 김성수 생가 앞을 지난 선운리 가는 길로 좌회전, 그곳에서 2.7km 거리다.
질마재는 작고 평범한 시골마을이다. 그저 산 밑에 농가들이 다보록하게 모여 있고 그 속에 사람들이 대대로 큰 욕심 없이 살고 있는 곳. 그곳에서 1915년 5월18일 서정주 시인이 태어나 우리 현대문학사상 가장 중요한 시인의 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마을의 나무나 꽃, 산과 강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 사이에 흘러 다니는 이야기들을 일구어내고 연마해서 「질마재 신화」라는 시편들을 만들었다. 작고 볼품없는 평범 속에서 시인은 눈부신 시어들을 뽑아내었다.
가는 길은 한적했다. 햇살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주저하는 듯이 엷은 미소만 보냈고, 길가엔 풀꽃들이 잔잔하다. 코딱지풀, 개불알꽃, 별꽃... 등, 문우 한 분이 자세하게 꽃 이름을 일러준다. 누군가가 꽃 이름을 지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 이름에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고 또 오늘처럼 그 누군가가 꽃 이름을 신기로워하듯이 시인은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했고 오늘 우리는 그 시어들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람이 분다. 황토내음도 묻어 있고 솔내음도 담겨져 있는 듯하다. 몇 걸음발을 옮기는데 잔 돌부리가 발길에 뒤척인다. 가슴이 설렜던 탓인가. 잠시 휘청거리다가 다시 정립, 하늘을 본다. 맑은 군청색 하늘에서 수십 년 전 시인이 바라다보았을 빛깔을 찾아본다.
고즈넉하다. 아무도 없다.
집 마당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기자 휘익 바람이 일어선다. 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적막 속에 잠자던 기억들이 부스스 깨어나는 듯하다. 시인의 고택을 지키고 있는 건 바람과 햇살 그리고 보잘것없는 풀꽃뿐인가. 사방을 둘러본다. 초가집 붉은 흙벽은 드문드문 떨어져나갔고 나무기둥 결은 세월의 바람에 거칠어진 농사꾼의 살결처럼 마냥 마디마디 굵은 무늬를 새겨 넣었다. 옹이 진 나뭇결이 살 만큼 살아 온 노인의 가슴팍에 새긴 한처럼 이제는 감출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는 듯이 알몸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다.
켜켜이 쌓인 고요와 적막을 쓸어냈을, 닳아버린 싸리빗자루가 담벼락에 힘겹게 기대서 있다. 오늘은 나그네들이 떨어뜨린 세속의 먼지라도 쓸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 몸을 추스르는 듯...
정지간이며 곳간 문에 붉게 녹슨 대못도, 한때는 그 억센 힘으로 사이사이를 잇고 조여 주던 품새는 어디로 갔는가. 이제는 힘에 부치는 듯 허허로운 한숨만 내쉰다. 모두 세월 탓이다. 주인이 없는 탓이다. 돌보는 이 없는 탓이라고도 한탄해본다.
오래전 할머니의 나막신이며 아버지의 검정 고무신 등, 식솔들의 신발이 쉬었을 툇돌에는 얄팍한 햇살 한 줌 얹혀 호젓이 쉬고 있다. 좁다란 툇마루에 잠시 걸터 앉아본다. 가끔씩 스치는 바람이 문고리를 흔들어보지만 문 열고 반겨줄 이 없는걸 아는 듯이 멀쑥이 물러서고 만다.
시인 저정주는 여기서 나서, 그로서는 처음 세상의 빛과 사물의 형태와 사람들의 마음을 그 영혼 속으로 불러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내 곁에 계시던 기억으로 제일 어린 일은 두 살이나 세 살인 듯하다. 그때는 여름 낮이었는데 사랑방에서 어머니가 아래를 벗은 나를 안고 내 사타구니에 부채질을 하고 계시고 방 안에는 부인들이 그득히 둘러앉아 그중에 강민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한 부인이 내 사타구니에 있는 고추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뭐라고 했다. “워마, 애기 고치에도 땀이 나네.” 아마 그런 말씀이었던 듯하다. 지금도 라파엘의 후광을 쓴 성모의 눈썹 같은 그 부인의 초승달같이 가느다란 눈썹이 내 살 속과 마음속을 비취는 듯하다.
- 서정주 「자전」에서-
아기 서정주가 아래를 벗은 채 어머니에게 안겨 있던 방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동네 부인들이 가끔 모여와 이러저런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며 서정주는 이 방에서부터 시작되어 차츰 마당으로 울 밖으로 동네 밖으로 발길과 시야를 넓혀갔을 것이다.
마당 한쪽에 나지막한 돌로 쌓은 우물이 있다. 시인의 어머니가 철렁철렁 물을 길어 푸성귀를 씻고 보리를 일어 밥을 안칠 때 시인은 우물가에 담긴 하늘을 안고 달을 품고 시심을 길어 올리지 않았을까. 무심한 나그네 행여 건져 올릴 사연이라도 있을까 하여 기웃거려 보는데 말라버린 우물 안에는 마른 잡초만 무성하다.
그 옆 장독대엔 빈 독들이 엎드려 한없는 휴식을 취하고 나무 울타리 곁에 사철나무인 듯 잎 청청한 키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3대가 산다는 높다랗고 실팍한 까치집이 기우뚱 내려다본다. 아! 그제야 깨닫는다. 돌보는 손길 없으니 발길도 뜸한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건 까치 식솔들뿐이었구나.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미당문학관이 옆에 우람차게 버티고 있건만 왠지 바스러질 듯이 후락해져가는 유향재(有鄕齋), 이곳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몇 번을 주춤거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가서 깊게 느끼고 싶은 시인의 체취 때문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면 어느 곳에 남아있을 것 같은 시인의 흔적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선운사 춘백(春栢)과 만남의 약속 때문에 아쉬움을 남기고 서둘러 질마재를 하직해야만 했다.
다시 오겠다는 기약은 하지 않았다. 어느 봄날 문득 선운사 춘백이 생각나면, 바람결 스치듯이 다시 들러보마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뿐...
'마음에 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인도,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11.15 |
---|---|
사막에 핀 유도화,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11.13 |
'섬진강 기차여행',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11.03 |
'아름다운 약속',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11.02 |
'아름다운 약속',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0) | 2009.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