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창

헐거워짐에 대하여,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心 鄕 2009. 11. 17. 12:25

헐거워짐에 대하여,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헐거워짐에 대하여

 

가을이 깊어가는 첫째 징조는 헐거워짐이라고 했다. 어느새 집 앞 나뭇잎들이 한결 성글어졌다. 치열했던 여름이 물러서고 숭숭 구멍 뚫린 듯 헐거워진 잎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들어선다. 푸른 물기 탓에 깊숙이 들어서지 못했던 햇살은 얇고 투명해진 잎 세포 위로 가을 햇살을 불러들이고, 집착이 사그라진 열정은 또 다른 빛으로 나뭇잎을 물들이는 것이다. 선홍빛으로, 황금빛으로.


가을빛은 여름보다 깊다. 강하게 직선으로 내리꽂혀 표면만을 달구는 것이 아니다. 비스듬히 깊숙이 스며들며 지난 여름날들의 상처를 치료해주며 어제를 돌아보게 만든다. 강한 방어의 표시인 가시로 덮여 있던 밤송이가 헐거워졌다. 마음을 열고 햇살을 불러들인 것이다. 두터운 잎 사이에 덮여 있던 감들이 헐거워진 잎 사이로 떫은맛을 떨어버리고 붉게 익은 자신을 드러낸다. 모두 영글었다는 표시이다.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다는 여유로움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와 나 사이 처음 만날 때 봄날 같은 설렘도 세월이 지날수록 헐거워졌다. 몸에 꼭 끼인 옷, 빨고 삶아내고 하다보면 느슨해진 허리며 몸통 탓에 스스로도 지탱하지 못하고 흘러내리고 말아버리는 것처럼. 우리 사이로 들어선 헐거움에는 격식이나 허례를 털어낸 편안함이 주는 넉넉함은 있지만 권태로움과 소홀함이 따라 들어섰다. 어쩔 수 없이 누그러진 열정, 상대편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만의 고집으로 좀처럼 좁히지 못하는 그 사이로 잊힌 소중한 추억도 넣어보고 낙엽처럼 고운 빛으로 채색도 해본다.


나 또한 가을로 들어선 듯하다. 그래서인지 요즘 내가 한결 헐거워졌다고들 한다. 불숙 던진 말 한마디로 인해 상대편에게 상처 입혔을까봐 괴로워했고, 누가 무심히 건넨 한마디 말로 인해 며칠씩 잠 못 다고 뒤척이기도 했다. 작은 일에 조바심 치고 견디기 어려워하는 탓에 갈이 오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빡빡하게 조이던 일상이 어느 날부터 느슨하고 헐거워졌다. 그 사이로 가을 햇살 같은 편안함이 깊숙이 들어섰다. 단풍처럼 또 다른 빛깔의 나를 만난 수 있게 된 거다.


헐거워짐에 대하여, 그러나 그 사이로 들어서는 무심한 세월의 바람을 한탄하기보다는 새롭게 채워 넣어야할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가을이다. 헐거워진 가을은 그래서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기 위한 계절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