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종소리
적막하다.
“땡그랑 땡그랑!”
거실 창문위에 달아놓은 바람 종이 한가롭게 몸을 흔들면서 소리를 내고 있다. 놋쇠로 만든 종 모양과 꽃잎모양이 어우러져 흡사 아기들의 모빌 같기도 한데, 선뜻 찾아온 바람에 맡긴 채 청아한 소리로 창가를 맴돈다.
흔히 절이나 누각 처마 밑에 달려있는 바람 종은 선비의 시정을 돋우고 나그네의 여정을 달래주었으며, 특히 불교에서는 경세(警世)의 의미를 지닌 불구(佛具)의 하나로 수행자의 방일(放逸)이나 나태함을 깨우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나 역시 나른하게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깨워 또 다른 종소리를 듣고 싶어 지난 시간 속으로 들어선다.
야트막한 울타리 낮은 대문 문설주 위에 작은 종이 매달려 있다. 담장 너머로 손을 넣어도 될 만큼 시늉뿐인 어설픈 문빗장, 그도 그냥 열려있을 때가 더 많았다. 들어서는 이를 따라. 나서는 이를 따라 ‘땡그랑! 댕그랑’ 종소리만 기척을 낸다. 부엌에서 저녁 준비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의 손은 바쁘건만 마음은 온통 그 종소리에 가 있다. 정신없이 뛰어놀다가 ‘엄마!’를 부르면서 들어서는 아이들과 함께 덩달아 신이 나는 종소리.
아이들은 들어서기도 전에 서둘러 종부터 흔들어 소리를 낸다.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것이다. 반가운 손이 들어 설 때면 종소리가 먼저 반색을 한다. 행여 귀가 시간이 늦은 아버지를 기다리던 밤에는 스치는 바람결에 울리는 종소리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겹고 따스한 사연만큼이나 종소리가 많이 울렸던 유년의 나의 집.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종소리와 다시 만났다. 담임선생님은 작은 종을 가지고 계셨다. 수업이 시작될 때면 창가에서 종을 흔드신다. 등교시간에 늦은 아이들이나 혹은 운동장에서 놀이에 정신을 팔고 있던 아이들도 그 종소리를 듣게 되면 한숨에 달려오게 된다. 또 지루한 공부시간엔 끝나는 시간의 종소리를 조바심을 치면서 기다렸다.
교회에서는 종각을 높이 세워 종소리가 더 넓고 크게 울릴 수 있도록 했다. 종지기는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종을 친다. 푸르스름함 새벽, 은은하게 울리는 교회 종소리는 천사의 음악인 듯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종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퍼져나가면서 어둠에 내어주었던 자신의 빛을 찾게 하려는 사랑의 깨우침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그 소리에 맞춰 우리를 위해서 기도 하셨다.
어른이 되어 좀 더 큰 종소리를 듣게 됐다. 서울 근교의 사찰에서도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경주 수학여행 중에 에밀레종 소리도 들었다. 해마다 12월 마지막 날 자정이 되면 제야의 종이 울린다. 보신각종도 울리고 에밀레종도 울린다. 흩어진 지나간 한 해의 상념을 모아 돌아보고 또한 새해를 복되게 맞이하려는 울림이다.
종은 스스로 소리를 내지 못한다. 부딪힘과 그 부딪힘의 아픔을 울림으로 승화시킨 소리는 깨달음이고 또한 변화를 위한 기원이다. 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많이 아파야 한다. 웅장하고 큰 종이 내는 울림은 크다. 그 여운이 깊어 물결처럼 무늬를 만들면서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작은 종의 소리는 가볍지만 밝고 명랑하다. 무 생명체인 금속성 종이 내는 소리의 파장이 가슴을 치고 깊숙이 들어서 파도치듯 울렁이게 한다. 참으로 오묘하고 신기하다.
‘땡그랑~ 땡그랑~.’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온다. 내 안에도 종이 있는 듯하다. 또 하나의 다른 내가 나와 부딪히면서 소리를 내고 있다. 불국사에 계신 월산스님의 말을 빌리면, ‘종은 쳐야 녹슬지 않는 법이다, 만물이 자기 기능을 잃으면 생명이 끊어지듯이’라 하지 않았던가. 약하고 게으른 나를 끊임없이 깨우치기 위해서 아픔과 고난의 바람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쉼 없이 종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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