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창

백발과의 투쟁,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心 鄕 2009. 12. 5. 21:59

백발과의 투쟁, 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

 

백발과의 투쟁


어느 날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던 백발이 언제부터인가 제 집 뜰인 양 검은 머리를 내몰고 자리를 넓혀갔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내몰아치는 격이다. 원래 숱 많고 윤기 자르르 흐르던 흑빛 머리가 주인이거늘 어찌 저리 분수도 모르고 무례하단 말인가. 처음부터 단호하게 자리를 내주지 말았어야 했다. 인정에 끌려 내몰지 못한 나를 탓해본다.


처음에는 그랬다. 숱이 많던 머리 사이로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는 흰머리에, 그럴 수도 있겠다. 새치인데 뭘, 하며 무심했다. 그런데 웬걸 다 조상 탓이라고 새신랑 때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았는지, 제 분수 모르는 흰머리가 자꾸 줄기를 뻗고 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원래 불필요한 잡초가 생명력도 강하고 성장도 실한 것처럼 뽑아내도 막무가내로 영역을 넓혀가는 품새가 밉살스럽기 그지없다.


팔순의 어머니가 햇살 설핏 기우는 툇마루에서 중년의 막내딸 무릎에 눕혀 놓고 족집게로 흰머리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육순을 넘기면서부터 간혹 하나 둘 흰머리가 눈에 띄었지만, 한가하게 자리 잡고 앉아 뽑아내거나 검은 물 한 번 들여 보지 않은 어머니시다. 그런 어머니가 점점 고운 티 가시고 빛바래지는 한철 꽃처럼, 흰머리 하나 둘 비치는 딸이 못내 안쓰러우셨나 보다.
“안 좋은 건 즈이 아버지를 닮았어.”
어머니의 한숨 쉬듯 뱉어내는 혼잣소리가 아득하게 귓가에서 맴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처음 머리에 염색이란 걸 해 보았다. 안타까워 뽑아내줄 이도 없지만 뽑아내기에는 이젠 한 가닥도 아깝게 숱이 적어졌다. 새치 몇 가닥이라고 위로하기에는 너무 넓고 무성하게 자리 잡았는지라. 이제는 주인이 누구인지 객이 누구인지 모를 일이 되어버렸으니 어설픈 소탕작전으로는 어림도 없는 듯싶다. 그러나 한숨만 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무래도 포장작전에라도 나서야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겸연쩍은 발걸음으로 미적미적 미장원을 찾아가야만했다.


미용사는 내 머릿결을 이리저리 들추어가면서 참으로 안됐다는 듯이 “아직 이러실 때는 아닌 것 같은데...”하면서 이내 사정없이 붓질을 해댔다. 진득한 검은 물감은 희끗희끗 비추는 빛바랜 세월 같은 백발을 모두 덮어버렸다.

 


‘백발에 화냥노는 년이...센(흰)머리에 흑칠하고...과 그른 소나기에 흰 동정 검어지고 검던 머리 다 희거다...’ 란 속요(俗謠)가『청구영언(靑丘永言)』에 있다. ‘흰머리에 흑칠을 하고 나섰더니 어찌 소나기가 내린단 말인가. 흰 동정은 검어지고 검게 칠한 머리는 다시 백발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니 가는 세월 붙잡고 싶은 여인네의 안타까움에 실소를 머금다가도 가슴이 짠해졌는데...

거울 속에 나는 포장인지 위장인지 무어라 표현할 길은 없어도 듬성듬성 보이던 백발이 간 데 없다. 놀랍다 아! 앞뒤 비춰보는 거울 속에 난 어깨까지 내려오는 가지런한 흑발을 출렁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겼다.”


그러나 그 승리의 기쁨과 만족은 잠시,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고 했는가. 웬걸 하루 이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니 귀밑으로부터 여기저기 흰머리가 여봐란 듯이 삐쭉 삐죽 새순을 내밀었다. 예기치 못한 소나기 탓에 물들인 머리 흠뻑 적셔 빛바래게 한 것은 아니요, 다 바람처럼 빠르다는 시간이 부채질하여 불길을 돋우듯이 자람을 부추기니 어찌하겠는가.


연륜의 훈장처럼 백발성성한 중후한 노인의 모습이라면 차라리 체념이라도 해보겠지만, 이도 저도 아닌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백발을 살짝 덮어 눈가림이라도 해보려던 나는 슬며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거울 속 내 모습을 한탄하며 저만치 밀쳐 내버렸다.


세월을 이길 자 뉘리오. 에라, 모르겠다. 백발 감춘다고 세월이 멈출 것도 아닌데 자랄 테면 자라라. 셋돈 못내 집 쫓겨난 영락(零落)한 먼 친척이라도 된 듯이 그럭저럭 몸 비비적거리고 발 뻗을 만큼의 자리는 마련해 주어야 인정이 아니겠는가고 마음을 고쳐먹어 보았다. 그러나 자신할 수 없이 변덕스러운 게 사람의 마음이다. 어느 날 다시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이 변해서 저들을 모질게 다그쳐 내몰고 싶을지 모를 일이다.


염치고 뭐고 없이 다시 밀고 들어서고, 다시 내몰아 치고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날 우리 모두 기력이 쇠잔해서 지쳐버리겠지. 그래도 젊음이라는, 오래 전 떠나온 강 건너 저편에 대한 미련이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우리의 투쟁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듯싶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이 탓인가. 더욱더 옹졸해진 가슴 속에 가시덤불처럼 파고들어 자리를 넓혀가는 미움과 원망, 시기, 질투까지도 용서와 화해, 사랑이 듬뿍 스민 진득한 물감으로 붓질해서 감추고 덮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들이 다시 백발처럼 끊임없이 고개를 쳐들겠지만, 그 싸움도 지치도록 계속 해보는 거지 뭐, 내가 아직 싸울 기력이 남아 있는 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