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창

영월, 말없이 말하는 장릉

心 鄕 2011. 4. 14. 11:21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의 능인 장릉은 두 가지의 교훈을 말없이 말해주고 있는 소중한 영월의 자산이자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능침인 봉분에 자애로운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산자고 꽃이 왜 피어났는지를, 오밀 조밀 서로 서로 기대어 푸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노송은 비어있는 공간으로 등이 굽어지도록 왜 수그리고 있는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고명대신이라는 자부심과 명예 하나로 세종대왕의 왕자와는 국정을 논의 하지 않고, 어린 단종대왕에게 올리는 국사는 모범답안지에 황색표시를 하여 이것만 말하면 된다고 하던 ‘황표정사’로 인하여, 삼촌인 수양대군은 고명대신의 집을 음력10월10일 날의 밤에 찾아가 척살을 하게 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곤, 고명대신에게 줄을 섰던 인물들은 모두 임금이 부른다 하고, 궁으로 들어서면 그 자리에서 살해하는 계유정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린 왕인 조카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인의 장막을 쳐버린 소수의 인물들이 국사를 마음껏 주물럭거리는 현실을, 곁에서 지켜보던 수양대군은 지금처럼 진행된다면 조카인 왕의 권한을 대신들이 좌지우지 하고 있으니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판단하여 조카를 지켜주기 위하여 모두를 살해해야만 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하나 때문에 계유정난을 정당화하려하고, 수양대군은 물론이려니와 핵심인물들은 자신들의 권익과 안위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가운데 권한에 도전하는 인물은 가차 없이 처단하게 됩니다.

 

권력을 손에 쥔 수양대군과 대군을 따르던 인물들이 선택한 것은 단종대왕을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평민으로 신분을 격하하여 영월로 귀양을 보내고, 4개월 후에는 세종대왕의 여섯 번째 왕자인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계획이 발각되어 결국에는 금성대군 자신도 죽게 되고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 목숨을 거두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어린 왕을 중심으로 지기들끼리 국정을 마음껏 주물럭거린 것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을 듣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잠재적 권한이 있는 이들과는 전혀 협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감과 미래 안위가 보장되지 않아 자신이 살기 위해 모두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수양대군과 그를 따르는 인물들에 대한 선택의 결론이었습니다.

즉, 정보의 공유와 참여를 통한 토론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은 권력자들을 모두 제거하는 결과의 역사입니다.

 

 

 

그와는 정 반대로 1698년 숙종대왕은 단종사후 241년이 지나도록 살아있는 권력이 두려워 아무도 말하지 않던, 노산군을 조선의 왕으로 인정하고 복위를 시켜야 한다는 평산 신 씨 신규의 상소문을 받아든 숙종대왕은 조정의 모든 대신들과 관리들에게 신규의 상소문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제출하라고 어명을 내리게 됩니다.

 

수양대군, 즉 세조의 편에서 권력찬탈의 주인공들이었던 공신들의 후손들은 절대로 왕으로 복위시켜서는 아니된다하고, 간접적인 피해와 직접적인 위해를 당한 문중의 후손들은 세조의 과거지사는 부족한 점이 있었으니 이번기회에 조선의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잡아야 한다 하고, 글 한줄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자신은 물론이요 3족의 생사가 달려있다고 판단한 인물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두루 뭉실 좋은 게 좋다는 뜻을 표하게 되고, 어떤 인물들은 왕가의 일에 대하여 말을 하게 되면 후환이 두려워 아예 의견을 재출하지 않게 됩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니 숙종대왕에게 되돌아온 회답은 491장이나 되었습니다.

 

이를 받아든 숙종대왕은 회답을 하지 않은 조정대신과 관리들의 명단을 제출하라 하명하고 의견을 말하지 않은 관료들 모두를,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양심에 따라 말하지 않는 인물들은 이 나라 국사를 논할 가치 없는 인물들이며 백성을 편안하게 모셔야 할 자격이 없는 이들이니 모두를 사탈관직을 명 하게 됩니다.

 

숙종대왕은, 묘호를 단종으로 한다. 능호를 장릉이라 한다. 능은 추복 능과 후릉의 례를 따라 조성한다 고 최종적인 확정을 하게 됩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는 인물들도 자신들의 생각을 임금에게 회답하는 문서에 충분히 밝혔고 임금 또한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표했다하더라도 구분 없이 개인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모습에 감복하여 임금의 결정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표하지 않게 됩니다. 이리하여 단종대왕이 숭하한지 241년만에서야 공식적으로 왕으로 기록되고 복위가 됩니다.

 

여기에서 숙종대왕이 펼친 정보의 공개와 공유, 개별 인물들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개방의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월의 장릉에 잠들어 계시는 단종대왕의 역사 하나에서 밀실정치는 참담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고, 정보의 공유와 참여의 정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사는 말을 하지 못하니 아픔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기록으로 말하고 있고, 기록은 활짝 웃게 하는 일을 유전자로 이어받아 더욱더 아름답게 발전시키라 합니다.

 

2011년 4월이라는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복되고 신나는 일들만 되풀이 되는 날들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출판일 : 2011.04.14 09:39 인빌뉴스홈 > 인빌소식 > 강원 영월 술빛고을 | 기행/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