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規樓 上樑文 / 蔡濟恭
자규루 상량문 / 채제공
「樊巖先生集卷之五十八 번암선생집권지58」
산애포사。山哀浦思。산과 강은 슬퍼하고 그리워하며
백년지류치불개。百年之流峙不改。백년토록 변함없이 흐르고 우뚝한데
천장지구。天長地久。장구한 저 하늘과 땅 가운데
일루지성훼무상。一樓之成毁無常。누각하나의 흥폐가 무상하니
인신위지합모。人神爲之合謀。사람과 신령이 그 때문에 함께 도모하고
운월위지동색。雲月爲之動色。달과 구름도 그 때문에 낯빛을 바꾸었네.
석재제중화순야。昔在帝重華廵野。옛날 중화께서 순행하실 때
내유춘삼월등루。乃有春三月登樓。춘삼월에 이 누각에 오르셨지
삼양월중。三讓越中。세 번이나 나라 사양한 뒤 영월에서
비유의어선천전지회룡어。非有意於旋天轉地回龍馭。세상 바뀌어도 수레 되돌릴 생각 없었으나
오경루상。五更樓上。오경의 깊은 밤 누각에 앉았노라면
불금수어야월공산제자규。不禁愁於夜月空山啼子規 달빛 아래 두견새 울음에 밀려드는 근심이여!
악부전성。樂府傳聲。악부에서 그 성률을 전파하니
애원한어시리。僾㤪恨於詩裏。원한이 행간에 어렴풋이 묻어나고
산맹엄이。山氓掩耳。산골 백성들은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분배궤어장변。紛拜跪於墻邊。담장 가에서 어지러이 절하고 꿇어앉네.
이래창상지루경。伊來滄桑之屢經。그 후 상전벽해의 세월이 거듭 지나
어언점몰지이구。於焉墊沒之已久。자취조차 사라진지 이미 오래되었지
견성차지。鵑聲此地。이곳의 두견새 울음을
왕손녀지영시하년。王孫女之詠詩何年。왕손의 딸 언제 읊조렸던가!
촉백동풍。蜀魄東風。봄바람 두견새 울음에
이손곡지우모무소。李蓀谷之寓慕無所。이손곡은 그리움 부칠 곳 없었네.
회제혼이불가견。懷帝閽而不可見。대궐을 생각해도 눈으로 볼 수 없건만
모운황황。暮雲荒荒。저녁 구름은 어찌나 황량한지
사공자혜미감언。思公子兮未敢言。공자를 그려도 감히 말할 수 없거늘
춘초막막。春草漠漠。봄풀은 아득히 펼쳐 있구나.
사군규측。使君圭測。수령(守令)은 옛터를 측량할 때
무계산이방황。撫溪山而彷徨。산천을 더듬으며 이리저리 서성였고
자사차정。刺史車停。방백(方伯)은 수레를 세운 뒤에
순부로이망매。詢父老而茫昧。노인들에게 물어보나 도무지 오리무중
황리락원거원처。况籬落爰居爰處。게다가 담장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으니
이기지지동지서。而基址指東指西。동쪽을 가리키다가 다시 서쪽을 가리키네.
아연백성지가。俄然百姓之家。얼마 지나지 않아 백성의 초가집이
거귀팔인지염。遽歸八人之焰。사람을 감동시키는 화염에 느닷없이 휩싸이더니
회신표탕대풍기혜。灰燼飄蕩大風起兮。큰 바람 불어 재가 말끔히 날리자
와초종횡진형완이。瓦礎縱橫眞形宛爾。기와와 주춧돌이 도처에서 본모습 드러냈지.
협월경시。浹月經始。달포 만에 경영을 시작하여
종의장지위로。縱意匠之爲勞。정성을 다해 노심초사했으나
적설쟁영。積雪崢嶸。가파른 산에 눈이 수북이 쌓였으니
내목석지난구。奈木石之難具。목재와 석재 구할 방도 없었거늘
내륭동지월。迺隆冬之月。바야흐로 엄동설한의 계절에
홀대우련소。忽大雨連宵。홀연 큰 비가 내렸네.
어시령포동융。於是泠浦凍瀜。이에 청령포의 얼음이 녹아내려
운강벌이무애。運江筏而無碍。무리 없이 뗏목을 운행하였고
측경빙탁。仄徑冰坼。비탈길의 빙설이 갈라지니
예운근이여기。曳雲根而如期。예정대로 산 바위 끌어내렸지.
유영읍자진심성。惟營邑自盡深誠。감영과 고을에서 온 정성을 다했으나
이신극기문자사。而宸極豈聞玆事。임금께서 어찌 이 일에 대해 들었으랴!
유아주상전하。惟我主上殿下。우리 주상전하께서
우어만기지가。偶於萬幾之暇。우연히 정사를 돌보던 겨를에
념급륙신지충。念及六臣之忠。여섯 신하의 충정을 생각했는데
소사진심。所事盡心。진심으로 선왕을 섬긴 절의가
읍경광어로저。挹耿光於露渚。노저에서 환히 빛났네.
어사기감。於斯起感。이에 애틋한 감회가 일어나기에
열비승어심도。閱秘乘於沁都。심도의 신록 열람케 했는데
유자사관반폐지신。惟玆史官返陛之辰。때마침 사관이 복명한 날은
적회명루수주지일。適會名樓豎柱之日。이름난 누각의 기둥을 세운 날이었지.
번신치영척지상。藩臣馳盈尺之狀。번신이 치계한 것을
기왈우연。豈曰偶然。어찌 우연이라 말하리오!
신손유일기지통。神孫有一氣之通。신손께서 진실로 이와 같이
고여시의。固如是矣。전일한 기운으로 감통시킨 게지.
석실개궤。石室開櫃。석실에서 금궤를 연 것과
이재불모이동。異哉不謀而同。기이하게도 꾀하지 않았으나 일치하고
동산응종。銅山應鍾。신령한 종이 동산에 호응한 것이
시하약부지합。是何若符之合。어찌 부절을 합한 듯 들어맞는지!
숙능명언탕탕。孰能名焉蕩蕩。누가 감히 탕탕이라 명명하리오!
불감귀지명명。不敢歸之冥冥。감히 명명으로 결론지을 수 없다네.
오호。嗚呼。아!
금수장류。錦水長流。금강은 유장히 흐르고
명월불로。明月不老。밝은 달은 늙지도 않는구나.
조란채달。雕欄彩闥。아름다운 문과 난간 바라보니
황선인호루이거。怳仙人好樓而居。신선이 머무시기에 안성맞춤
풍마운차。風馬雲車。신령한 말과 수레를 몰면서
위아민불빈이소。慰我民不嚬以笑。우리 백성 위로하며 활짝 웃으리라.
청차여하불루원혈。聽此如何不淚寃血。이를 듣고서 어떻게 피눈물 흘리지 않을까!
지금등자료가소우。至今登玆聊暇消憂。허나 이제는 이곳에 올라 근심을 풀고 싶네
취화비석。翠華非昔。푸른 깃발은 예전의 것 아니건만
의기지단유린근。義起之壇壝隣近。의리로 일으킨 제단이 인근에 있고
감회지륜발순근。感懷之綸綍諄勤。옛일 회상하는 윤음이 근실도 하다.
청오주구。靑烏珠邱。청오의 주구에는
사시지예제생폐。四時之醴齊牲幣。사계절의 단술과 희생, 폐백이 나란하고
백학화주。白鶴華柱。백학 앉은 화표주(華表柱)에는
천재지성곽인민。千載之城郭人民。지금도 천 년 전의 성곽과 백성이라네.
자진단송。玆陳短頌。이에 짤막한 노래를 지어서
조거수량。助擧脩樑。기다란 들보 드는 것을 돕노라
포량동。拋樑東。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나
천하상심시월중。天下傷心是越中。온 세상이 슬퍼하는 건 영월이거든
유유원금여작일。惟有寃禽如昨日。원한 맺힌 새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청산화로곡동풍。靑山花老哭東風。청산의 시든 꽃에서 봄바람에 통곡하네.
포량서。拋樑西。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나
우습정화화욕저。雨濕庭花花欲低。뜨락의 꽃은 비에 젖어 고개 숙인 채
공리초연여부견。空裏愀然如復見。다시 만난 것처럼 공연히 시름하는데
화란의구여운제。畫欄依舊與雲齊。채색 난간은 예전마냥 구름과 나란하네.
포량남。拋樑南。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나
호장가전수사람。戶長家前水似藍。호장 집 앞의 쪽빛 강물은
최시춘심장단처。最是春深腸斷處。깊은 봄이면 애간장 끊어지는 곳이거늘
동청반엄락화암。冬靑半掩落花巖。동청은 낙화암을 반나마 가리누나.
포량북。拋樑北。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나
태백산광운외촉。太白山光雲外矗。태백산 산세는 구름 너머에 우뚝하고
백마편편영유무。白馬翩翩影有無。백마는 너울너울 떠나 그림자도 없거늘
문수배호충신륙。問誰陪扈忠臣六。단종을 호종한 여선충신은 누구이런가!
포량상。拋樑上。들보 위에 떡을 던지세나
금강동반월화방。錦江東畔月華放。금강의 동편 물가에 달빛 쏟아질 무렵
삼경영락허무중。三更影落虛無中。삼경의 그림자는 허무 속에 떨어지고
분주어룡수저탕。奔走魚龍水底蕩。분주히 헤엄치는 어룡은 물속에서 꿈틀대네.
포량하。拋樑下。들보 아래에 떡을 던지세나
회겁망망여고와。灰刦茫茫餘古瓦。잿더미 속에 남아 있는 오래된 기왓장
천리인정불가무。天理人情不可誣。천리와 인정은 결코 속일 수 없는 법
지금류체경행자。至今流涕經行者。지나는 행인조차 지금도 눈물 흘리네.
복원상량지후。伏願上樑之後。엎드려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뒤
원릉유신。園陵有神。능침에 계신 신령이시여!
최각불후。榱桷不朽。서까래가 썩지 않게 해주소서.
경영불일。經營不日。짧은 기간에 경영하여
고성공어이월중순。告成功於二月中旬。2월 중순에 낙성을 고하니
척강재천。陟降在天。저 하늘을 오르내리시며
수음즐어천추만세。垂陰騭於千秋萬歲。천년만년 음덕을 내려주소서.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전교를 받들고 찬술하다.
[참고문헌]「樊巖先生集卷之五十八 번암선생집권지58」「역주 장릉지속편 권2, 78~84쪽」
蔡濟恭
• 생년 1720년(숙종 46) • 몰년 1799년(정조 23) 1월 18일 • 본관 평강(平康)
• 저서(작품) 번암집 59권
• 대표관직(경력) 규장각제학·예문관제학·한성판윤·강화유수|우의정|영의정
[정의]1720(숙종 46)∼1799(정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효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유후(裕後)의 방계 5대손이며, 시상(時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윤(成胤)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이다. 어머니는 이만성(李萬成)의 딸이다. 홍주 출생.
[생애]1735년(영조 11) 15세로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 한림회권(翰林會圈) 때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선발되어 청요직인 예문관사관직을 거쳤다. 1751년에는 중인(中人)의 무덤이 있는 산을 탈취했다 하여 1년 이상 삼척에 유배되었다.
1753년에 충청도암행어사로 균역법의 실시과정상의 폐단과 변방대비 문제를 진언하였다. 1755년 나주 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問事郎)으로 활약했고, 그 공로로 승정원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대사간을 거쳤고, ≪열성지장 列聖誌狀≫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에 도승지로 임명되었다.
이 해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하여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했다 한다.
이후 대사간·대사헌·경기감사를 역임하던 중 1762년 모친상으로 관직을 물러나자, 이 해 윤5월에 사도세자의 죽음이 있었다. 복상 후 1764년부터 개성유수·예문관제학·비변사당상을 거쳐 안악군수로 재임 중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767년부터 홍문관제학·함경도관찰사·한성판윤을, 1770년부터는 병조·예조·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772년 이후 세손우빈객·공시당상(貢市堂上)이 되었다. 1775년 평안도관찰사 재임시에 서류통청(庶類通淸)은 국법의 문제가 아니므로 풍속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상소로 인하여 서얼출신자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의 깊은 신임과 함께 약방제조로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했고,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좌참찬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3월에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제조에 임명되어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어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하였다.
또한 정조 특명으로 사노비(寺奴婢)의 폐를 교정하는 절목을 마련하여 정1품에 이르렀다. 이 사노비절목은 점차 사노비의 수효를 감소시켜 1801년(순조 1)의 사노비 혁파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후 규장각제학·예문관제학·한성판윤·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의 세도가 무너지고 소론계 공신인 서명선(徐命善)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서자,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의 신원에 대한 과격한 주장으로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의 연관,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했다는 죄목으로 집중 공격을 받아 이후 8년 간 서울근교 명덕산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1788년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었고, 이 때 황극(皇極)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였다. 이후 1790년 좌의정으로서 행정 수반이 되었고, 3년 간에 걸치는 독상(獨相)으로서 정사를 오로지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 및 당하관 통청권의 혁파, 신해통공정책 등을 실시했으며, 반대파의 역공으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793년에 잠깐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일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여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그 뒤는 주로 수원성역을 담당하다가 1798년 사직하였다.
[활동사항]문장은 소(疏)와 차(箚)에 능했고, 시풍은 위로는 이민구(李敏求)·허목(許穆), 아래로는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또한, 학문의 적통(嫡統)은 동방의 주자인 이황(李滉)에게 시작하여 정구(鄭逑)와 허목을 거쳐 이익(李瀷)으로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였다.
때문에 양명학·불교·도교·민간신앙 등을 이단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상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측면에서 선용할 수 있다면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천주교[西學]에 대해서도 패륜과 신이적 요소를 지닌 불교의 별파로서, 이적(夷狄)인 청나라 문화의 말단적인 영향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서학을 믿는 자에 대하여 역적으로 다스리라는 요구를 당론이라 배척하고, 정조의 뜻을 받들어 척사(斥邪)를 내세우면서도 교화우선 원칙을 적용하려 하였다.
자신의 시대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로 생각했으나, 제도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강조, 중간수탈 제거, 부가세 폐단의 제거들을 추진하고 간리(奸吏)의 작폐를 없앰으로써 국가재정 부족을 타개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상업 활동이 국가 재정에 필요함을 인식했으나 전통적인 농업우선 정책을 지켰다. 또한,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사족(士族) 우위의 신분질서와 적서(嫡庶)의 구별을 엄격한 의리로서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영조연간 청남(南人淸流)의 지도자인 오광운(吳光運)과 강박(姜樸)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채팽윤(蔡彭胤)과 이덕주(李德胄)에게서 시를 배웠다.
친우로는 정범조(丁範祖)·이헌경(李獻慶)·신광수(申光洙)·정재원(丁載遠)·안정복(安鼎福) 등이 있고, 최헌중(崔獻中)·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 등이 그의 정치적 계자가 된다.
순조 때 유태좌(柳台佐)가 청양(靑陽)에 그의 영각(影閣)을 세웠고, 1965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홍가신(洪可臣)·허목·체제공을 모시는 도강영당(道江影堂)이 세워졌다.
저서로 ≪번암집≫ 59권이 전하는데, 권두에 정조의 친필어찰 및 교지를 수록하였다. 그는 ≪경종내수실록≫과 ≪영조실록≫·≪국조보감≫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상훈과 추모]1799년 1월 18일에 사망, 3월 26일에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묘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1801년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영조실록』『정조실록』『순조실록』『국조방목』『번암집(樊巖集)』
『여유당전서』『대동상현록』(이종하, 경인문화사, 1974)
「번암 채제공의 서학관연구」(조광, 『사총』 17·18합집, 1973)
「채제공의 경제정책에 관한 고찰」(김동철, 『부대사학』 4, 1980)
「조선후기 한문학사조사연구」(정옥자, 『한국사학』 5, 1983)
「탕평론과 정국의 변화」(박광용, 『한국사론』 10,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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