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彰烈巖記 洪直弼
梅山先生文集卷之二十八
記
彰烈巖記
人皆有一死。死得其所難矣。苟得其所。則死有榮於生者。以所惡之甚於所欲也。然死生之於人大矣。在男子猶然。况于婦人乎。在冠冕珮玉之君子猶然。况充後宮下陳之類乎。三代之制。世婦以下。自稱曰婢子。婢之言卑也。未必皆敦詩禮之敎。著柔靜之德。彼引羊車得蝶幸者。固是貽羞彤管。而寄情邊衣。題詩紅葉。用紓其幽怨者。亦豈女史內官之道哉。以故歷代革國之際。未聞有宮婢殉國者。豈秉彝之性爾殊哉。積欝之氣。因變故而發之。所以不志于死也。當百濟之亡。宮人爭投於白馬江。故名之曰落花巖。花巖之名。將與天地同其悠久。而扶蘇屋社。猶有一段生氣者。賴有是耳。粤若端廟之遜荒于越也。舊宮人隨侍于淸泠浦觀風軒。調護其飮食起居。備經百罹於霧露之中。而玉體無愆者。左右服勤之功。與爲多焉耳。逮端廟陟遐。咸赴越之錦障江而死。浮屍蔽江。是日也雷雨大作。烈風拔木。黑霧彌天。經夜不散。卽丁丑十月二十四日也。邑人憐之。名其地曰落花巖。襲白江也。設壇于巖上。有事則禱。知府洪聖輔樹三字碑。卽巖西十數武。建祠而祭之。愍忠祠是也。後知府曹夏望。改落花曰彰烈。鑱巖壁而銘之。余來越中。遊錦江亭。自亭而上。歷愍忠祠撫花巖碑。泛舟錦江。摩挲彰烈巖。徘徊久之。不忍去。守祠者爲言月夜環珮怳惚。往來於祠巖之間。若有覩焉云。苟其然者。芳魂貞魄。尙有不泯者存歟。不與大化同其冥漠歟。嗚呼。婦寺之忠。惟服事宮闈。趨走唯諾而已。不遑講君臣之大義。辨熊魚之取舍。而臨難致命。視死如歸。無一人苟免。若斯人之爲者。歷選千古。靡與倫匹。詎不奇哉。當是時。背恩喪義。賣國販君者。咸出於赤芾蔥珩。而蹈節輕生。乃在於紫衣紅袖何哉。所謂卿士。利害亂其中。禍福奪其外。而巧於趨避。故瞞天讕人。至於斯極。若婢子者。全理義之良心。不爲怵疚。靡所計較。故决性命於危迫之際。而有所不避也。端廟聖德罔愆。不以冲齡而或忽貫魚之戒。以故無內寵。斯人者皆非承恩之類也。特以眞誠所發。與共患難。義不可以苟活耳。豈欲與殉名之烈士。爭不朽於竹帛哉。昔田橫之客五百。重峯之士七百。而咸同日幷命者。是乃男子之身衣冠之族。氣義相感。至百死而不貳者固也。若至廁椒掖之側。侍巾屣之末者。豈知泰山鴻毛之重輕哉。用能殺身成仁如此。比兩者又加難矣。是所謂侍御僕從。罔非正人者耶。嗚呼。目見天地崩坼。人物消盡。而鼎湖之弓劒莫攀。蒼梧之廵狩未追。劫火餘焰。炎炎來逼。亦何忍無死哉。是豈可以已者乎。苟使若人。老死帷閫之內。孰知其純忠姱節。與日月爭光乎。然有知無知。亦何與當人分上哉。只是天理當然。吾不得不然耳。嗚呼。天憂無疆。無往不返。端廟復九五之位。備千乘之禮。黃流玉瓚。饗于淸廟。珠丘花欄。煥乎喬陵。死事之宗英文武。咸配食于仙寢之傍。而侍女寺人。亦與於其間。列朝追遠之誠崇報之典。殆無虧欠。於是焉神理人情。各安其正矣。沉江化碧之血。其將怡渙而無憾乎。抑亦凝結不散。與盂山錦水。同其崩絶乎。吾不得以知之。故述以文而志之。
彰烈巖記 / 洪直弼
창렬암기 / 홍직필
人皆有一死。死得其所難矣。苟得其所。則死有榮於生者。以所惡之甚於所欲也。
인개유일사。사득기소난의。구득기소。칙사유영어생자。이소악지심어소욕야。
然死生之於人大矣。在男子猶然。况于婦人乎。在冠冕珮玉之君子猶然。
연사생지어인대의。재남자유연。황우부인호。재관면패옥지군자유연。
况充後宮下陳之類乎。三代之制。世婦以下。自稱曰婢子。婢之言卑也。
황충후궁하진지류호。삼대지제。세부이하。자칭왈비자。비지언비야。
未必皆敦詩禮之敎。著柔靜之德。彼引羊車得蝶幸者。固是貽羞彤管。而寄情邊衣。
미필개돈시례지교。저유정지덕。피인양차득접행자。고시이수동관。이기정변의。
題詩紅葉。用紓其幽怨者。亦豈女史內官之道哉。以故歷代革國之際。
제시홍엽。용서기유원자。역기녀사내관지도재。이고력대혁국지제。
未聞有宮婢殉國者。豈秉彝之性爾殊哉。積欝之氣。因變故而發之。
미문유궁비순국자。기병이지성이수재。적울지기。인변고이발지。
所以不志于死也。當百濟之亡。宮人爭投於白馬江。故名之曰落花巖。
소이불지우사야。당백제지망。궁인쟁투어백마강。고명지왈락화암。
花巖之名。將與天地同其悠久。而扶蘇屋社。猶有一段生氣者。賴有是耳。
화암지명。장여천지동기유구。이부소옥사。유유일단생기자。뢰유시이。
粤若端廟之遜荒于越也。舊宮人隨侍于淸泠浦觀風軒。調護其飮食起居。
월약단묘지손황우월야。구궁인수시우청령포관풍헌。조호기음식기거。
備經百罹於霧露之中。而玉體無愆者。左右服勤之功。與爲多焉耳。逮端廟陟遐。
비경백리어무로지중。이옥체무건자。좌우복근지공。여위다언이。체단묘척하。
咸赴越之錦障江而死。浮屍蔽江。是日也雷雨大作。烈風拔木。黑霧彌天。
함부월지금장강이사。부시폐강。시일야뢰우대작。렬풍발목。흑무미천。
經夜不散。卽丁丑十月二十四日也。邑人憐之。名其地曰落花巖。襲白江也。
경야불산。즉정축십월이십사일야。읍인련지。명기지왈락화암。습백강야。
設壇于巖上。有事則禱。知府洪聖輔樹三字碑。卽巖西十數武。建祠而祭之。
설단우암상。유사칙도。지부홍성보수삼자비。즉암서십수무。건사이제지。
愍忠祠是也。後知府曹夏望。改落花曰彰烈。鑱巖壁而銘之。
민충사시야。후지부조하망。개락화왈창렬。참암벽이명지。
余來越中。遊錦江亭。自亭而上。歷愍忠祠撫花巖碑。泛舟錦江。摩挲彰烈巖。
여래월중。유금강정。자정이상。력민충사무화암비。범주금강。마사창렬암。
徘徊久之。不忍去。守祠者爲言月夜環珮怳惚。往來於祠巖之間。若有覩焉云。
배회구지。불인거。수사자위언월야환패황홀。왕래어사암지간。약유도언운。
苟其然者。芳魂貞魄。尙有不泯者存歟。不與大化同其冥漠歟。
구기연자。방혼정백。상유불민자존여。불여대화동기명막여。
嗚呼。婦寺之忠。惟服事宮闈。趨走唯諾而已。不遑講君臣之大義。
오호。부시지충。유복사궁위。추주유낙이이。불황강군신지대의。
辨熊魚之取舍。而臨難致命。視死如歸。無一人苟免。若斯人之爲者。
변웅어지취사。이림난치명。시사여귀。무일인구면。약사인지위자。
歷選千古。靡與倫匹。詎不奇哉。當是時。背恩喪義。賣國販君者。
력선천고。미여륜필。거불기재。당시시。배은상의。매국판군자。
咸出於赤芾蔥珩。而蹈節輕生。乃在於紫衣紅袖何哉。所謂卿士。利害亂其中。
함출어적불총형。이도절경생。내재어자의홍수하재。소위경사。리해란기중。
禍福奪其外。而巧於趨避。故瞞天讕人。至於斯極。若婢子者。全理義之良心。
화복탈기외。이교어추피。고만천란인。지어사극。약비자자。전리의지량심。
不爲怵疚。靡所計較。故决性命於危迫之際。而有所不避也。端廟聖德罔愆。
불위출구。미소계교。고결성명어위박지제。이유소불피야。단묘성덕망건。
不以冲齡而或忽貫魚之戒。以故無內寵。斯人者皆非承恩之類也。特以眞誠所發。
불이충령이혹홀관어지계。이고무내총。사인자개비승은지류야。특이진성소발。
與共患難。義不可以苟活耳。豈欲與殉名之烈士。爭不朽於竹帛哉。昔田橫之客五百。
여공환난。의불가이구활이。기욕여순명지렬사。쟁불후어죽백재。석전횡지객오백。
重峯之士七百。而咸同日幷命者。是乃男子之身衣冠之族。氣義相感。
중봉지사칠백。이함동일병명자。시내남자지신의관지족。기의상감。
至百死而不貳者固也。若至廁椒掖之側。侍巾屣之末者。豈知泰山鴻毛之重輕哉。
지백사이불이자고야。약지측초액지측。시건사지말자。기지태산홍모지중경재。
用能殺身成仁如此。比兩者又加難矣。是所謂侍御僕從。罔非正人者耶。
용능살신성인여차。비량자우가난의。시소위시어복종。망비정인자야。
嗚呼。目見天地崩坼。人物消盡。而鼎湖之弓劒莫攀。蒼梧之廵狩未追。劫火餘焰。
오호。목견천지붕탁。인물소진。이정호지궁검막반。창오지순수미추。겁화여염。
炎炎來逼。亦何忍無死哉。是豈可以已者乎。苟使若人。老死帷閫之內。孰知其純忠姱節。
염염래핍。역하인무사재。시기가이이자호。구사약인。로사유곤지내。숙지기순충과절。
與日月爭光乎。然有知無知。亦何與當人分上哉。只是天理當然。吾不得不然耳。
여일월쟁광호。연유지무지。역하여당인분상재。지시천리당연。오불득불연이。
嗚呼。天憂無疆。無往不返。端廟復九五之位。備千乘之禮。黃流玉瓚。饗于淸廟。
오호。천우무강。무왕불반。단묘복구오지위。비천승지례。황류옥찬。향우청묘。
珠丘花欄。煥乎喬陵。死事之宗英文武。咸配食于仙寢之傍。而侍女寺人。亦與於其間。
주구화란。환호교릉。사사지종영문무。함배식우선침지방。이시녀사인。역여어기간。
列朝追遠之誠崇報之典。殆無虧欠。於是焉神理人情。各安其正矣。沉江化碧之血。
렬조추원지성숭보지전。태무휴흠。어시언신리인정。각안기정의。침강화벽지혈。
其將怡渙而無憾乎。抑亦凝結不散。與盂山錦水。
기장이환이무감호。억역응결불산。여우산금수。
同其崩絶乎。吾不得以知之。故述以文而志之。
동기붕절호。오불득이지지。고술이문이지지。
창렬암기 / 홍직필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나, 마땅한 곳에서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 마땅한 곳에서 죽을 수 있다면, 죽어도 사는 것보다 영예로운 것이니,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삶을 원하는 마음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란 사람에게 있어 중대한 문제다.
남자에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부인의 경우야!
관을 쓰고 패옥을 친 군자에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후궁과 희첩의 경우야!
삼대의 제도를 살펴보면, 세부(世婦) 이하의 여인들은 스스로를 비자(婢子)라고 칭했는데, 비(婢)는 비천하다는 의미다.
이들 모두가 시경(詩經)과 삼례(三禮)의 교화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고, 온유하고 정숙한 덕행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양이 끄는 임금의 수례를 유인하여 총애를 얻는 것은 진실로 동관(彤管)에 수치를 남겼다.
변방을 지키는 남편에게 옷을 보내 마음을 전하거나, 붉게 물든 나뭇잎에 시를 적어 마음속에 서린 원망을 펼치는 것이 어찌 여사(女史)와 내궁(內宮)의 도리이리오!
그러므로 역대로 나라가 바뀔 즈음에 궁비(宮婢)가 순국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찌 하늘이 내려준 떳떳한 성품이 달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켜켜이 쌓인 울분이 변고로 인하여 표출된바, 죽음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백제(百濟)가 망할 무렵, 궁인들이 다투어 백마강(白馬江)에 몸을 던졌기 때문에 ‘낙화암(落花巖)’이라 명명했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부소산(扶蘇山)의 옥사(屋社)에 한 토막의 생기라도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낙화암이 있기 때문이다.
아!
단종께서 저 황량한 영월로 은둔하셨을 때, 옛 궁인들이 수행하여 청령포와 관풍헌에서, 시종하며 음식과 일상생활을 조호(調護)하였다.
안개와 이슬 속에서 온갖 환난을 겪으면서도 옥체가 무탈했던 것은 좌우에서 근실하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단종께서 승하하시자, 모두들 영월 금장강(錦障江)에 나아가 목숨을 버렸는데, 강물에 뜬 시체가 온 강을 가릴 지경이었다.
바로 그날, 비와 천둥이 크게 몰아쳤고 사납게 이는 바람에 나무가 뿌리째 뽑혔으며 하늘을 뒤덮은 시커먼 안개가 밤새도록 개지 않았다.
이날이 바로 정축년(丁丑年 1457. 세조 3) 10월24일이다.
고을 사람들은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며 그곳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백마강의 전례를 계승한 것이다.
그리고 낙화암 위에 제단(祭壇)을 설치한 뒤,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신명에게 기도하였다.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는 ‘낙화암(落花巖)’ 세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운 뒤, 낙화암 서쪽으로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곳이 바로 민충사(愍忠祠)다.
훗날 영월부사 조하망(曹夏望)은 ‘낙화(落花)’라는 이름을 ‘창렬(彰烈)’로 고치고는 절벽 위에 새겨 넣었다.
나는 영월에 와서 금강정(錦江亭)에서 노닐다가, 위로 올라가 민충사(愍忠祠)를 경유하여 낙화암(落花巖) 비석을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금강(錦江)에 배를 띄운 채 창렬암(彰烈巖)을 어루만졌고 한참동안 배회하며 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사당을 지키는 자의 말에 의하면,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패옥 소리가 사당과 낙화암 사이를 어렴풋이 왕래하는데, 실제 두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만약 그러한 일이 사실이라면 곧고 아름다운 혼백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인가!
여태껏 죽은 귀신이 되어 적막한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인가!
아아!
부시(婦寺)의 충성스러움은 오직 궁궐에서 시종하며 경건히 걸음을 옮기고 공손히 순종하는 것뿐이다.
군신 간의 커다란 절의를 강론하거나 곰발바닥과 물고기를 취사하는 의리에 대해 변론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나 위난(危難)에 맞닥뜨리자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듯 아무렇지 않게 여겼고, 단 한 사람도 구차하게 죽음을 회피한 자가 없었다.
이들이 실천한 것은 천고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필적한 만한 경우가 없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당시 배은망덕하고 의리를 저버리며 나라와 임금을 팔아먹은 자들은 모두 붉은 슬갑과 푸른 패옥을 착용한 고관대작 중에 나온 반면, 절의를 지키며 목숨을 가볍게 여긴 자는 자주색 저고리와 붉은 소매를 착용한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른바 벼슬아치들은 이해관계가 그 마음을 어지럽히고 화복이 그 행실을 좌우하므로, 약삭빠르게 이익을 추구하고 재앙을 회피한다.
그러므로 사람과 하늘을 기만하는 것이 이 지경까지 이르는 것이다.
궁녀의 경우는 의리를 변별하는 선한 마음을 온전히 지켰으므로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않았고 묘모조모 따지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급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숨을 내던지며 죽음조차 회피하지 않은 것이다.
단종의 성스러운 덕은 허물이 없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행여 관어(貫魚)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은바, 딱히 총애하는 궁녀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임금의 승은을 입은 자가 아니다.
다만 진실한 정성이 발로하여 임금과 환난을 함께한 것이요,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 명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烈士)들과 더불어 사책에 남길 불후한 명성을 다투겠는가!
옛날 전횡(田橫)의 식객 500명과 중봉(重峯)의 병사 700명은 모두 같은 날에 죽음을 맞았다.
이들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거니와 의관을 갖춰 입은 사대부 출신이었다.
그러니 의기(義氣)가 감별하여 백 번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초액(椒掖)의 곁에 끼어들어서 두건과 신발 따위를 시중드는 말단의 사람들이 어찌 태산(泰山)과 홍모(鴻毛)의 경중을 알아 이처럼 살신성인했겠는가!
이들의 살신성인은 전횡이나 중봉의 경우보다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이른바 “시종하며 수레를 모는 복종(僕從)들이 올바른 사람이 아닌 이가 없었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이들은 하늘과 땅이 무너지고 수많은 인물이 죽어가는 상황을 두 눈으로 목도했다.
게다가 정호(鼎湖)의 궁검(弓劒)을 더위잡을 수 없거니와 창오(蒼梧)의 순수(廵狩)를 뒤따르지 못했는데, 겁화(劫火)의 남은 불길마저 맹렬하게 핍박해 오니, 어지 차마 죽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만약 그들이 궁궐 안에서 늙어 죽었다면, 어느 누가 그들의 순수한 충정과 아름다운 절개가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오!
그러나 알아주거나 혹은 알아주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의 직분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저 천리상 마땅하므로 부득불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아아!
끝없는 우환일지라도 언젠가는 회복되기 마련이다.
단종께서는 구오(九五)의 자리를 회복하셨고, 천승(千乘)의 예법이 구비되었으며, 옥찬(玉瓚)으로 울창주를 따라 종묘에 모셔졌고, 능침의 아름다운 난간이 높다란 언덕에서 환히 빛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랏일로 목숨을 바친 종친과 문`무반은 모두 능침 곁에 배향되었고, 시녀와 환관도 그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여러 임금께서 현인을 추모하는 정성과 융숭히 보답하는 전례가 거의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이에 신리(神理)와 인정(仁情)이 각각 올바른 명분에 안주했으니, 강물 속에 가라앉아 푸른 옥으로 변한 피가 장차 흔쾌히 풀리며 더 이상 유감이 없을까?
아니면 여전히 응결되어 흩어지지 않은 채 우산(盂山)`금장강(錦障江)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여 무너지고 끊어질까?
이것은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문을 찬술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 역주 장릉지속편 장릉지보유 288~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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