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기고문

2008 영월문협의 남도문학기행

心 鄕 2008. 5. 2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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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의 김윤식 생가와 다산초당 그리고 보길 윤선도 유적지를 찾아서


일상을 접어두고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영월문협이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영월군이 후원한 이번 강진과 해남 땅끝마을 그리고 보길도 문학기행에서의 배움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이 글을 쓰고 있다.


영월문협 구성원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전액 무료로 1박2일간의 문학탐방 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니, 무엇으로 보답을 할 것인가에 대한 중압감이 있었다. 뭔가는 보탬이 되는 사안을 찾아와야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타 지역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문학발전을 위해 노력하는가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하니 좀 편안했다.


이른 아침 6시 30분에 일행과 만나 강진으로 향하는데 멀기도 멀었다. 오후 2시에 강진 입구에 도착했으니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강진으로 향하는 길에는 잠이 솔솔 오는데, 차창 가에는 누런 보리밭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면적의 논에 있는 이 보리들을 수확하고 나면 모를 심을 것이다. 이미 모심기를 마친 곳도 있었고 어떤 곳은 못자리 준비를 위해 트랙터가 써레질을 하고 있었다. 기온의 차이 때문에 1모작만이 가능한 영월은 상대적으로 소득과 생산성에서 큰 차이가 나는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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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 있는 영랑생가에 도착하니 ‘양치중‘ 전라남도 문화유산해설사이자 강진문협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충 70대줄에 서 계시는 분인데 문인의 특성답게 똑 부러지는 발음과 언변에서 남도문학을 이어가는 분답게 높은 지식과 폭 넒은 문학관에 기초하여 진행되는 해설에서 매우 만족할만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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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생가로 향하는 오른쪽을 보니 2층 건물에 기와가 올려져 있는 향토문화관이 시선에 들어왔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우뚝 솟아오른 지붕의 처마머리에 오늘의 강진문화가 있게 한 여러 인물들에 대한 각종자료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1층에는 노전 묵창선 화백의 그림과 완향 김영렬 화백의 그림, 그리고 김현구 시인의 시집이 자리하고,
2층에는 영랑 김윤식 시인의 작품집이 전시되고 있었다.
모태야 영랑 김윤식 시인이었겠지만 가정집을 매입하여 문화관으로 개축하고 강진출신 시인과 화가의 자료들을 한자리 보관 정리하여 관람할 수 있는 전시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놀랐다.
이는 영월에는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장의 문학과 미술품을, 문학과 예술의 중심에는 소중한 사람 즉, 지역의 인물존중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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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에서는 존재해 있는지 없는지, 매일 만나는 이웃사람이기에 주목받지 못하는데, 이곳에서는 문화의 맥을 이어가려 노력하는, 문화의 가치를 고장의 인물에서 국가의 인물로 승화시키는 대목에서는 강진군의 노력이 돋보였다.


일반적으로 사후에 모든 자료들을 모아서 문학적인 가치평가를 거쳐 고장을 빛낸 문인으로 추대한 후 선양화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문인의 문학사상과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온갖 노력들을 하는 과정에서 정작 당자는 말이 없어, 올바른 기록들이 담기지 못하고, 때로는 과장되거나 왜곡된 모습들을 보는 것이었으나, 이곳에서는 자신의 고백과 증언을 바탕으로 문화관이라는 공간을 마련하여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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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에서 영랑생가에 이르는 골목길

좌우에는 민가들이 있었지만 담은 돌담으로, 바닥은 사각 돌을 길이방향으로 박아놓았다. 시멘트나 아스팔트 포장에서 오는 지금이라는 인공적인 부분을, 김윤식 시인이 이곳에서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서울로 이주할 때까지 거주하면서 겪었을 수많은 사연들과 애환 그리고 문학작품의 산실로 접어드는 골목길을 방문객 자신도 모르게 당시 시대로 이끄는 분위기 조성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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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생가..
1950년 9월29일 서울에서 47세의 나이로 포탄의 파편을 복부에 맞아 타계한 시점에서 세력(世歷)은 불과 58년 전의 오래되지 않은 역사인데 이미 강진에서는 1985년부터 터를 매입하고 문학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유족과 주변 인물들의 고증으로 복원되었다는 생가에는 대문으로 들어서는 왼쪽에는 커다란 자연석에 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잇술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 어느날 그하로 무덥든 날


떠러저 누은 꼿닙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처 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三白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테요
찬란한 슬품의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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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섬 대농의 5남매에서 2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나 17세인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을 다닌 인물로 작은 언덕위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뒷산을 배경으로 터를 잡은 그의 생가앞 좌우로 들어서 있는 여러 채의 집들은 소작인들의 주택이었다고 한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행랑채 대문으로 내려다보이는 넓은 땅에서는 곡식들이 자라나 가을이면 어김없이 커다란 풍요를 가져다주는, 그야말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부를 더해주는 그의 세월, 그의 세상이었으나, 1916년 14세의 나이로 첫 혼인 후 1년 반 만에 부인과의 사별로 아픔을 겪고, 1925년에 개성여인과 재혼하게 되는데, 그의 젊은 청춘시절은 여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풀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
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십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붓그럼가치
詩의 가슴을 살프시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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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개틀닌 古風의 퇴마루에‘
사개틀닌 古風의 퇴마루에 엄는듯이 안져
아즉 떠오를 긔척도 업는 달을 기둘린다
아모론 생각업시
아모런 뜻업시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삿분 한치식 올마오고
이 마루우에 빛갈의 방석이
보시시 깔니우면


나는 내하나인 외론 벗
간열푼 내 그림자와
말업시 몸짓업시 서로 맛대고 잇스려니
이밤 옴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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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닙에 빗나는 마음’

내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츰날빗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듯 눈엔듯 또 피ㅅ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잇는곳
내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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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1923년에 만난 최승희와의 혼인이 부친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한 점에 크게 실망을 했던가 보다.

 


자리를 이동하여 사적 107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다산(丁茶山) 유적지를 오르니

숲에서 발산하는 자연의 향기들이 가슴가득 드리우고 벅찬 가슴을 헐떡이면서 초당에 이르니 기와집이었다.
설명서에 따르면,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유배되어 살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곳으로 순조 원년(1801) 신유교옥으로 인하여 ‘장기’를 거쳐 18년간 귀양생활을 하였는데, 외가인 해남 윤씨가 거주하는 이곳에서 11년을 지내면서 강진만을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초당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저술에 전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포' '흠흠신서' 등 500여권에 달하는 저서가 이곳에서 완성되었다고 한다.
산비탈에 세워진 정자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옛 주인의 심정을 헤아려 볼 사이도 없이 해는 서산에 걸리고 갓 이소한 어린 산새들의 어미 찾는 소리 하며, 초당에 우거진 숲에는 내 그림자가 안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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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마량의 바닷가를 찾았다

어슴푸레 어둠이 밀려오는 초저녁 무렵이었다.


저 멀리 집을 찾아 들어오는 작은 고깃배들
그 위를 날고 있는 갈매기와 함께

저녁놀은 물들고 있다


바닷가 안개는 드리우고 있다

모두를 감싸 않으려는 듯
세상의 하루를 마감하려는 듯
하얗고 뿌연 바다의 안개들이

포구로 포구로 밀려들고 있다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 내 마음
길게 숨은 쉬어지고 고개는 먼 바다를 응시한다

오늘 하루도 또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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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일정인 보길도 선착장이 있는 곳
땅끝마을 숙소에  들어서니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가 다가온다
언덕위에 자리 잡은 모텔에 보따리를 끌러놓고 문밖을 나서니 바다가 보인다.

 

바다멀리 하늘과 맞대어있는 수평선이 보이는 곳
시원한 밤바람에 지난날의 아픈 기억들만 잊어버리려는 듯
고운 일들만, 미소 짓던 기억들만 다시 담아내려는 듯
마음속에 정리를 하지만

 

그래도 뚜렷이 생각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들과 부족했던 일들만 떠오른다
밤바다는 묻지도 않았고 말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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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향하는 선착장에는

많은 차량과 여행객으로 붐볐다.
뱃머리가 커다란 입을 벌리니 작은 승용차에서부터 커다란 버스까지

마치 고래뱃속에라도 들어가는 듯 차곡차곡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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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선실에 들어서니 바닥은 따뜻하게 전기온돌이 되어있어 드러눕기에 좋았다.
어젯밤의 여독이랄까 방에는 목침처럼 생긴 어구가 여러 개 있었다.
하나씩 배계처럼 비고 눕기에 덩달아 누우니 따듯한 등짝에 저절로 잠이 쏟아진다.
배를 타면 드러누워 자는 게 상책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30분 거리라는데 누워서 한 숨 자는 게 좋았다.
덜덜덜 심한 진동과 소음을 느끼면서도 배에 올랐으니 선장에게 맡긴 몸이다.

 
옆에서는 동심으로 돌아가 발과 발을 길게 뻗어 마주하고 쎄쎄쎄 놀이를 한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다르고 어린 추억들이 다른 이들이 기억들을 말하니 한 가지 노랫말로 정리되고, ‘쎄쎄쎄 앞니 빠진 갈가지 우물가에 가지마라 ~~~’ 라면서 옆 사람 무릎을 두드리고 깔깔 웃으면서 놀이를 즐기더니 오손도손 정이 담긴 이야기꽃이 오고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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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는 섬 속에 육지였다.
커다란 배가 토해낸 버스를 타고 산과 들 그리고 모내기에 바뿐 주민들을 차창으로 보면서 윤선도 유적지로 향했다.
세상살이에서 무엇이 그리도 그리워 할 일이 많았던지 연민이랄까 미련이랄까 세상사를 잊어보려 했던가.
거처의 이름까지도 세연정(洗然亭)으로 하여 18년 동안 기거하면서 글을 쓰고 후학들을 가르쳤다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도랑물은 넓디넓은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3천여 평의 면적을 둘러 싼 담을 계원(溪苑)이라 부르는 입구에 들어서니 큼직한 바위들이 연못에 떠 있는 양,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는 중국 항주의 ‘유원’이라는 고택의 정원을 보는 듯 했다.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에는 세연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는 듯, 풍경에 빠져드니 발걸음은 느리게 느리게 옮겨지면서, 1587년에 태어나 1671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산 윤선도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수많은 바람과 아픔 그리고 세상에 대한 외침과 애사들을 짐작해 보았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우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를 보고는 여생을 보낼 장소로 터를 잡은 것이 51세 때인 1637년으로,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연못을 파고 건물을 지어 주변을 가꾸면서 세상을 잊고자 애쓰는 삶을 살았던 곳이라 한다.
잊으려 했으면서도 당시 정치사에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에 자주 상소를 올려 81세에도 유배생활을 했다고 한다.
태어난 고향이 해남이라 했으니 일찍이 이곳 보길도를 알고 있음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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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의 삶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부분으로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후학을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을 오늘날 현대사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지식인들은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비교해 볼 수 있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 농촌으로 돌아와 자라나는 2세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임금이 불러도 자신의 철학과 배치되는 사고에서는 거부하고, 거부한 죄로 귀양을 갈 지언즉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윤선도의 지조에서 오늘날에 시사 하는 바가 매우 크다.
오늘날 지금이라는 이 시대는 동시간대 정보교류가 가능한 인터넷 시대에서 자신의 지식과 여유를 도시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농촌의 현실을 풍요로움으로 탈바꿈 해줄 인재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쓰고, 원로 지도자로서 역할을 해 주어야 할 일 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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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별이 흐르는 문학의 고장 영월’

지난 42년간 진행한 단종문화제와 10년간의 김삿갓문화큰잔치에서 축적된 경험과 자료·자산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시인대회를 개최하여 문학계로부터 집중 시선을 받아 문학의 산실로 기대 받고 있으며, 문학이 심성의 근본으로서 ‘내 마음의 성지‘로 꿈과 희망 속에 미래를 잉태하는 문학의 고장 영월이 되었으면 한다.


이미 방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잡혀졌다고 본다.
영월문학의 근본이자 맥을 이음에 있어, 조선시대에는 시선 김병연 김삿갓이 영월의 노루목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대시대로는 1909년 1월4일 태어나 1985년 1월7일 생을 마감하기까지 우리나라 문학계의 원로로서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회장과 한국현대시조시인협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영담(影潭) 김어수(金魚水) 시조시인의 탄생지가 바로 영월 땅 상동읍 직동리이다.
2008년 연초부터 영월문화원이 집중조사하고 있는 영월의 인물사 편찬에서 최종 마무리가 완료되면, 다가오는 2009년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영월의 문인들과 관계관청이 연합하여 김어수 시조시인의 문학세계를 재조명하는 문학 사업절차를 준비 중에 있다.


세계적인 조각가인 ‘박찬갑’ 국제현대미술관장과 ‘유정’ 영월출신 시인이 국내최초로 기획한 ‘시와 조각의 만남 전시회’가 오는 7월20일부터 10월 20일까지 3개월간의 일정으로 국내 저명시인의 작품을 접수받아 ‘시와 조각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작품제작 중에 있어, 오는 8월 중순에 개막 예정인 ‘2008 동강 아트밸리프로젝트’ 국제행사와 동반하여 전시회 개막식을 개최하기로 되어 있어 ‘시와 조각의 만남 그리고 아트밸리전’이 세계 여러 나라에 영월의 능력을 널리 알리는 효과를 가져와, 문학의 고장 영월이 국제적으로 존중받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어, 민과 관이 합심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또한 영월군은 명품도시건설 프로젝트로 아름다운 영월 가꾸기 문화의 도시 디자인개념을 도입하여 시와 문학의 거리조성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동강시스타에서는 세계문학인을 위한 실내 공간구성과 야외문학공원을 조성하겠다고 한다.


이제 남아있는 과제는 문학과 예술 인구의 저변확대에 노력하여 다양한 연령층에서 폭넓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전국적으로 인맥을 넓히는 교류가 이뤄져 문학과 문화 그리고 예술이 접목된 소득기반에서 풍요로운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2008 문학기행을 위해 배려해 준 영월군 관계자분들과 프로그램을 짜임새 있게 기획하여 알차게 배움이 많은 문학탐방이 되도록 이끌어준 영월문협 임원진에게 감사드리며, 양치중 강진문협회장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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