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기고문

[칼럼]고향은 기다리지 않는다

心 鄕 2008. 12. 17. 11:30

고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자격이 있는가?


이웃이든 친구이든 평소에 꾸준한 교분이 있어야 한다.

교감한다는 것,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매일 얼굴을 맞대고 비비적거리면서 싸움이 있을 것이고 배를 움켜쥐고 뒤로 자빠질 정도로 크게 웃을 일도 있을 것이다.

 

이웃집 손자가 어미 품에만 안겨 있더니 같이 세월을 걸어가듯이 어느 날엔가 걷기 시작하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주 만나니 두 손 들고 반겨오고 팔 벌리면 스스럼없이 가슴으로 안겨드는 어린 아이는 자신과 충분한 교감을 나누었기 때문에 마음 편안히 온 몸을 맡기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낯모르는 이가  아이에게 안겨들으려 했다면, 두려움과 겁에 질려 그 자리에서 물고 말았을 것이다.

 

최근 이 땅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타향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물이, 소위 출향인사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고위층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듣게 된다. 공통점이라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고장, 당사자의 고향이자 부모세대의 애환이 담겨있는 이 땅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에 대한 해답이 없다.

아무리 상층의 자리에 올라 영광스러운 명예의 자리에 있다하더라도, 나는 찾아가거나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뿌리가 있는 고향이라는 곳에 대하여 아무런 기여를 했다는 증거들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기여라는 단어는 돈을 많이 벌었으니 투자나 기부를 했느냐? 도 아니고 고위층에 있으니 고향땅에 지대한 영향력을, 소위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여 무언가 커다란 이익이 되는 사업들을 해 주었느냐? 도 아니다.

평소에 고향을 자주 찾아와 이웃을 만나고 같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하여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나누고 얼굴을 마주보며 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있었느냐?를 나는 내 나름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도시에서 그래도 잘 나간다는 소문이 있는 고위 인사가 부모가 사망하였다 하여 고향을 찾아와 부모의 세상살이 무대였던 이 고장에 뼈를 묻으려 하니,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모습들을 여러 번 보아왔다.

자신들이야 자신의 주변에 달라붙어 있는 이들이 울타리를 치고 있어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보잘것없는 촌부의 눈에는 너무도 잘 보이고 있다. 그 자리를 떠났을 때는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될 터인데, 인지했다는 모습은 찾을 길 없다.

고향에는 자신과 말이 통하는 이도 있고 안 통하는 이도 있다. 언제든지 자신의 수준으로 되돌아 갈 수 있기에 수준에 맞추어 주는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

 

살아가면서 고향사람들과 어깨를 맞추고 자주 만나려고 노력하는 이도 있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향사람 팔아서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공유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접복시켜 조금 더 향상된 고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애쓰는 이도 있다.

 

있을 때 잘 해 라는 노래가 있듯이 고향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자신이 존재할 때 고향과 얼마만큼 교류하느냐에 따라서 고향 사람은 고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자격이 있다 없다를 판가름하는 기준점이 된다고 본다.

집 밖에서 아무리 잘한다 해도 집안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인생은 쓸쓸한 회한만이 자신을 찾아든다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뼈를 묻을 고향은 언제까지나 기다려주지는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