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선생님 수필집 『나도 춤추고 싶다』90~93쪽
오래된 우물
어린 시절, 집을 나서 언덕을 조금 올라가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서면 깊은 우물이 있는 집이 있었다. 수도가 있는 집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흔치 않았던 우물은 어린 나에게 신기로움이었다.
가끔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날이면 양동이 두 개를 들고 어머니를 따라서 그 집으로 갔다. 유난히 샘이 깊어 물맛이 좋다던 우물은, 어머니가 몇 해를 두고 장을 담그기 위해 물을 길어오던 곳이기도 했다. 또 동네 아줌마들이 심심치 않게 모여들어 물을 긷고 푸성귀를 씻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던 곳이었다. 처음에는 골목 한 쪽에 있는 우물을 담장을 넓히면서 자신의 뜰에 가두어 놓은 집주인은 문을 항상 열어놓겠노라고 약속했었단다.
차돌 듬성듬성 쌓아올린 우물가에 서면 나는 으레 좁고 깊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물결 출렁이지 않아 아직 이지러지지 않은 우물 속에는 맑은 물처럼 눈매 서늘한 내가 있었다. 잔잔한 하늘도 담겨져 있었다.
두레박이 한없이 내려가면서 철~석 철~석 물과 마주치는 소리가 음악처럼 귀를 울렸다. 말갛고 동그랗게 비쳐보이던 우물 속 하늘이 이내 얼굴을 찡그리고, 나 또한 파문(波文)을 안은 채 우물을 드려다 보았다. 두레박은 좁다란 우물가 돌들에 이리저리 몸을 부딪치면서 거듭 아래로 내려갔다. 맑은 물을 길어 올리기 위한 힘겨운 몸짓이 만들어낸 시퍼런 멍이 이끼가 되어 돌 틈 사이에 숨죽이고 있었다.
커~어! 두레박이 넘실거리는 물을 벌떡 들이키는 어머니를 따라서 나도 물 한 모금을 들이켜 보았다. 상큼한 수돗물에 익숙해져 있는 내게 찝찝한 우물물맛은 낯설었다. 그런데 그 물맛이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입안에 남아 가시지 않았다.
어머니는 물을 길어 쌀을 씻고 양동이 가득 물을 채우셨다. 두 양동이만큼 물을 길었는데도, 내어준 자국을 내색 않는 우물은 여전히 그만큼의 깊이로 그만큼의 물을 안고 있었다. 출렁거림이 잦아든 우물 안에는 찌푸린 자국 지운 내 모습이 있었고 잔잔한 하늘이 잠겨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가끔 그 우물이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물을 길러 가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좀처럼 단수가 되지 않았고 설혹 단수가 된다 한들 미리 받아 놓은 물이 있어서 우물까지 가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끔 맛살이며 조갯살을 팔러오던 행상 아줌마가 전해준 이야기는, 집주인 남자가 첩살림 차리느라 빚에 몰려서 우물에 빠져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아니, 마누라와 빚 독촉 하러 온 이들 앞에서 엄포로 빠지겠다고 했다는데 그만 발이 미끄러져 미처 손 쓸 수도 없이 빠졌다고 했다. 아쉽게도 우물은 이내 메워 덮어버렸고 모두의 기억 속에서 아득히 사라져버렸다.
모두의 우물을 뜰 안에 가두어 놓고 문을 열어 놓겠다고 약속했던 주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니, 모두의 우물을 자신만의 우물로 차지하려던 욕심이 지나쳐서인가, 홀로 끌어안고 가버렸으니.
그 후 살던 동네에서 우리는 이사를 했고, 그 오래된 우물도 아득하게 잊혀졌다. 그러나 나는 어른이 되어 살아가면서도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현실 속 갈증을 풀기위해서인지, 가끔 그 막원한 기억 속 우물가를 서성이곤 했다. 남다르게 연약한 몸으로 한 세상 살아오면서 늘 목이 말랐다. 가파르게 경사진 세상 길, 힘차게 달려가는 이들을 따라가야 하기에는 힘이 부쳤기 때문이었다.
흡사 제 탓이라고 제 가슴 치듯이, 탕! 탕! 두레박 천천히 내려가면서 좁은 우물 벽에 이리저리 부딪히는 아픈 소리를 듣는다. 늘 높고 순수한 세상만을 목 타게 원했던 탓에 연이어 맑은 물을 길어 올리려 했는가 보다. 가실 새 없이 검푸른 멍, 안으로만 머금었을 한 맺힌 가슴팍을 쓸어본다. 꼭 그만큼의 하늘만을 안고는 만족하며, 퍼내어도 다시 고이는 정 뿌리치지 못한 채 속울음 삼켰을 애달픈 사랑을 들여다본다.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 이제야 내가 우물의 깊은 속내를 품었는가. 어느 결에 내 가슴 한복판에도 습윤한 기색이 아릿하게 퍼져나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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