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역사 유적

영월 장릉의 장판옥, 공경은 복으로

心 鄕 2012. 2. 6. 18:52

 

 

영월 장릉의 장판옥, 공경은 복으로

안녕하세요!
오늘은 영월 장릉의 옛 이야기 제8편으로 장판옥(藏版屋)에 대하여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藏版屋이라고 하면 감출 藏에 널빤지 版에 집 屋을 사용하는 사당인데요.
건물의 용어 그대로를 해석하면 널빤지에서 무엇을 감추어 둔 집이 됩니다만, 감출 장(藏)자를 모실 장(藏)자로 해석하면, 널빤지에 무엇을 모셔둔 집, 바로 충신 분들의 위패를 모셔둔 집이 됩니다. 이곳에 모셔진 분들은 조선국 제6대 단종임금님 한분만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잘 모실 수 있을까?에 애쓰다 수양대군과 세조의 세력에 의하여 숨져 가신 268분의 이름세자를 한분 한분 새겨놓은 충신사당이 됩니다.


이런 말이 있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550여 년 전의 일이었는데도, 조선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달리함에도, 오늘날까지 존중받고 있는 분들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고 있습니다.


장릉에서는 여러분에게 말씀을 올리기가 가장 어려운 장소이기에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당대에서는 임금 다음으로 영의정이라는 높은 관직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 까지 충절하나만으로 삶과 죽음의 길을 달리하셨던 분들로서 더욱 더 공경의 예를 다하여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그 옛날에 사셨던 역사의 인물 분들이기에 공과를 떠나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장판옥에 모셔진 분들은 충신으로 36인, 조사위 186인, 환관군노 44인, 여인위 6인 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세조가 임금이 되기 전인 대군일 때와 임금이 된 후에 임금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약 1만여 명을 사사시켰습니다.

 

조선국에서 가장 아픔만 가득한 역사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수양대군이 첫 번째로 한 일은 1453년 10월 10일 밤에 좌의정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서 그 아들과 함께 척살을 하게 됩니다.

이튿날에는 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인물들은 모두 어린 임금의 명이요 하면서 궁궐로 들어오게 합니다.

이때에 살생부에 명시된 인물들 한명 한명씩, 궁궐의 대문으로 들어서는 족족 살해를 하기 시작하여 약 400여명을 사사시켰다하고, 역사에서는 계유정란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는

1456년 6월2일 김질이라는 인물의 고변, 고발에 의하여 실패로 끝난 사육신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등이 능지처참이라는 끔직한 형벌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는 데요,

이때에 약 600여명을 사사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영월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영주 순흥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순흥에는 단종임금의 여섯 번째 삼촌인 금성대군이 귀양내려와 계셨습니다.
이곳에서 가만히 계셨더라면 단종임금께서는 명대로 오래도록 사셨을 터인데요.

그렇지를 못하고 임금에게 사약이 내려오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금성대군은 단종임금이 영월 땅에 유배되자 화를 참지 못하고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임금을 국왕으로 모시고자 하는 기획을 하게 됩니다.

 즉,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죽령제와 문경세제를 기점으로 영남과 남도의 세력을 귀합하여

영월에 유배된 임금을 순흥으로 모셔다 놓고 조정을 치면 승산이 있다 이것을 계산했습니다.

 

하여, 격문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자신의 침소에 잘 보관을 해 두었다가 택일이 되면 방방곳곳에 붙여 만백성들에게 그 뜻을 알리려 했습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씀을 올리면 민중봉기서가 되는데요,

그 내용은 세조가 왕의 자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상왕을 노산군으로 감봉하여 영월 땅에 귀양까지 내려 보냈으니

세조를 제거하고 임금을 다시 모시자 라는 대자보가 됩니다.

 

 

 

이 때에 순흥부사 이보흠을 모시던 관노가 있었고, 금성대군은 몸종 금연이라는 여인이 모시고 있었습니다.

부사가 대군의 처소를 자주 방문하니 그럴 때마다 금연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른들이 방으로 들면, 봉당 밑에 기다리면서 어른들끼리 나누는 밀담을 자연스럽게 듣게 됩니다.

 

 

이보흠의 관노가 가만히 들어보니 이거 큰일 날 일을 꾸미고 있거든요,
이 일이 발각이라도 된다면 자신들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으니까 금연에게 이렇게 말을 하게 됩니다.

 “지금 두 어른이 뭔가 큰일을 꾸미고 있으니 결정적인 증거만 있으면 우리는 목숨을 건질 수 있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잘 살 수 있으니 어떻게 하든 찾아서 내게 달라”고 말하게 됩니다.

~역사는 항상 심복이 배반하기 때문에 안타까운 이야기가 이어지게 됩니다.

 

 

 

택일만 남은 격문을, 금성대군의 처소에 고이 간직했던 격문을

금연이라는 여인이 사랑하는 이에게 갖다 주는 바람에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죽임을 당하게 되고,

조정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세조의 보필신하들인 한명회와 정인지, 신숙주 등은 세조에게 이렇게 말을 하게 됩니다.

“거 보십시오, 이미 1년 전에 일어났던 사육신 사건 때 단종임금을 사사시켜야 한다고 그렇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상왕이 살아있는 한 이러한 일이 자꾸 발생하니 이제는 죽이셔야 합니다.” 하니

 마지못하여 사약을 내였노라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이 신하들이 다 잘못한 것으로 되는 것 입니다.


그러면서 조정에서 군졸이 내려오고 안동도호부에서 군졸이 올라와 순흥이라는 고을 전체를 뺑 둘러싸고 명이 내리기를,

 “세 살까지만 살려두라” 했습니다.

 네 살부터는 세상사 보고 들은 것을 죽을 때까지 기억한다! 고 보았기 때문에 순흥고을 전체가 몰살을 당했습니다.

당시에 살해당한 백성의 숫자는 표기되어 있지 않고 단지 집이 700호 되었다 이것만 있습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3대가 한 집에서 같이 살았었는데요,

조선시대에도 한집에서 3대가 같이 살았다고 본다면 대충 10명씩은 됩니다.

그러면 한집에 10명씩이니까 곱하기 700채 하면 약 7천명이 됩니다.
이때에 백성의 피가 내를 이뤄 10리를 흐르게 되었고, 맨 끝에 도달한 마을을 피끝마을이다 라고 했는데요!

지금도 순흥에 가시면 피끝마을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는 금성신단이라 하여

금성대군 신위와 순흥부사 이보흠의 신위, 당시 순흥 고을 백성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신위

이렇게 3개의 신위가 한자리 모셔져 매년 제례를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는 최소 8천명, 조금 보태면 1만 명이 세조의 손에 죽임을 당했는데요.

그중에서 268분의 신위만 여기 모셔서 매년 4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에 진행되는 단종문화제에서,

정자각에 제물을 차려놓고 단종임금님에게 먼저 제향을 올린 후에

마주보이는 배식단에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후대에서 구전되는 백성들의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력을 따라 줄을 서게 되는데요.

자신의 신념과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귀영달을 위한 줄서기는 절대로 해서는 아니 된다 했고요,

 

옛말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을 가면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친구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목숨은 물론이요 일가의 몰살을 각오하고,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자 애를 썼던 선대 어른들의 신념,

신의와 절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나를 도와주기 위하여

내 곁에 계시는 분에게 나는 지금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 를 되돌아보게 하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역사의 현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상은 영월 장릉의 장판옥에 모셔져 있는 268분의 충절에 대하여 말씀을 올렸습니다.

 


▲ 영월 장릉의 장판옥, 공경으로 복을 받고 계시는 단종임금의 충신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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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일 : 2012.02.06 13:50  김원식기자 (dw-carpos@invil.org) / 기자주소 http://reporter.news.invil.org/dw-carp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