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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영월이야기] 제1편, 단종신도비 / 김원식(영월군문화관광·지질공원·자연환경해설사)

心 鄕 2015. 9. 3. 14:00

 [옛날 옛날에 영월이야기] 제1편, 단종신도비
                 - 김원식(영월군문화관광·지질공원·자연환경해설사)


장릉의 홍살문을 지나 오른쪽 비각 안에는 단종대왕의 내력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1733년에 영조대왕께서 해조에 명을 내려 한양에서 비석을 만들고 글을 새긴 다음, 강물 오르는 길을 따라 영월까지 운반하여 장릉에 세운 비석이라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비석의 뒷면에는 단종대왕의 탄생에서부터 승하하신 연월일과 제향을 올리기 위해 위패는 어디에 모셨다는 것까지, 후대인들이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그림 그리듯 한문을 그리면 답을 알려주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한글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옛날 옛날의 기록인 한문을 한글로 해석하여 언제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도록 공개한 홈페이지가 있고 문집도 있어, 한문이라는 글자 속에 담겨 ‘내가 여기 있었기에 너를 기다리고 있었노라’ 는 듯 282년의 세월을 지켜본 <단종신도비>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조선국의 역사이자 영월의 역사를 한글화 해 준 그대로 <역주 장릉지속편> (38쪽) ‘능소의 비문陵所碑文’ 내용을 옮겨 독자분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먼저, 단종의 신도비는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는가? 에 대한 해답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영조 34권, 9년(1733 계축년) 6월 19일 1번째기사. 장릉의 비석 설치 문제를 논의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는데 경기 감사 신방(臣昉)과 전 감사 윤양래(尹陽來)가 함께 들어왔다. 
~ 윤양래가 말하기를,~
“신이 영월(寧越)에 재임(在任)할 때 장릉(莊陵)을 봉심(奉審)하였는데 당초의 상설(象設)이 단지 망주(望柱)와 무석인(武石人)만 있고 비석이 없었습니다. 능소(陵所)가 대단히 먼데 만일 비기(碑記)가 없으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무엇으로 능침(陵寢)이 있는 곳을 알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북도(北道)를 안무(按撫)하면서 모든 능(陵)을 두루 봉심하였는데 역시 다 비석이 있었는데 그 길이는 두어 자를 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장릉에도 역시 여기에 의하여 비석을 세워 아무 대왕(大王) 아무 능이라 쓴다면 마땅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능침이 있는 데가 대단히 멀고 또 성고(聖考)께서 추복(追復)한 것이 뜻이 있으니 선대(先代)의 뜻과 서업을 계승하는 도리에 있어서 문적(文跡)이 없을 수 없다. 듣건대, 북도의 모든 능의 비석도 역시 다 검약하다 하니 여기라 해서 또한 어찌 반드시 풍대(豐大)하게 하겠는가? 아직 앞으로 봐서 본도(本道)에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자, 윤양래가 말하기를,
“영월에는 원래 비석에 마땅한 돌이 없습니다. 신이 재임할 때에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의 비석을 세웠는데 돌의 품질이 대단히 좋지 못하였으니, 경사(京司)에서 돌을 다듬고 글자를 새겨서 수로(水路)를 따라 능소로 운반하면 편리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월 수령이 오히려 엄호장의 비석을 세웠는데, 나라에서 능침에 아직도 비석을 세우지 못한 것은 참으로 부끄럽다.” 하고,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묘당(廟堂)에 물어 거행하게 하였다. 엄흥도는 단종(端宗)이 승하(昇遐)했을 때 충성을 다하여 노고를 바친 사람이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지금의 서울에서 표석을 만들고 글자를 새겨 한강->남한강->금강(오늘의 동강)까지 수로(水路)를 따라 운반하여 장릉에 세운 비석이 됩니다.

그렇다면 비문에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한문 원문과 한글 해답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앞면 : 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조선국 단종대왕 장릉)
뒷면 :
端宗大王 諱 文宗大王 嫡嗣  
단종대왕 휘 문종대왕 적사
母妃 顯德王后 權氏 以 正統 辛酉 七月二十三日 誕生
모비 현덕왕후 권씨 이 정통 신유  7월 23일   탄생
王 戊辰 封 王世孫
왕 무진 봉 왕세손
景泰 庚午 冊封 王世子
경태 경오 책봉 왕세자
壬申 五月 文宗 昇遐 王嗣 登
임신  5월 문종 승하 왕사 등
大位 乙玄 尊爲 上王 上號 恭懿溫文  
대위 을현 존위 상왕 상호 공의온문
天順 丁丑 王在 江原道 之 寧越郡 是年 十月二十四日 薨 春秋 十七
천순 정축 왕재 강원도 지 영월군 시년   10월24일  훙 춘추  17
葬 郡 北 辛坐乙向 原
장 군 북 신좌을향 원
肅宗大王 二十四年 戊寅 追諡 王 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숙종대왕  24년   무인 추시 왕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廟號 端宗 陵 日莊 附 永寧殿 上之九年 癸丑 命 竪石于 陵以識之
묘호 단종 릉 일장 부 영녕전 상지 9년 계축 명 수석우 릉이식지



[해석]조선국 단종대왕 장릉
단종대왕의 휘(는 ‘홍위’로) 문종대왕의 적사(본처가 낳은, 집안의 대를 이을 맏아들)다.
모비인 현덕왕후 정통(명나라 영종 때의 연호 1436~1449) 신유년(1441년, 세종23년) 7월23일에 왕을 낳으셨다.
무진년(1448년, 세종30년) 왕세손에 봉해지고,
경태(명나라 대종 때의 연호 1450~1456) 경오년(1450년, 문종 즉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임신년(1452년, 문종2년) 5월 문종께서 승하하시자, 왕세자로서 왕위에 오르셨다.
을해년(1455년, 세조 즉위) 왕을 높여 상왕으로 삼으며, 공의온문 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천순(명나라 영종 때의 연호 1457~1464) 정축년(1457년, 세조3년) 왕께서 강원도 영월군에 계셨는데, 그해 10월24일에 훙서(임금, 왕족,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하셨다.
춘추(나이)는 열일곱이셨다.
영월군 북쪽 신좌을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숙종대왕 24년 무인(1698년)에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이라는 시호를 추상하고 묘호는 ‘단종’으로 정했으며 능호는 ‘장’이라 하고 영녕전에 합사하였다.
금상(영조) 9년 계축(1733) 능침에 비석을 세워 기록하도록 명하셨다.




영월장릉의 표석, 단종신도비!
비문에 담긴 옛날 옛날의 일이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고난과 아픔을 겪은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닮지 말아다오!” 그렇게 들리고 있습니다.